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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갈 2:1-21(19-21) (#203,490)

제목 : 이신득의

 

 

一. 바른 진리를 파수하라 (1-18)

1) 예루살렘 공의회 참석 (1-2)

바울이 제3차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였다(행 15장). 바울이 제1차 예루살렘 방문 후 14년 동안 사도들과 교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목적은, 바울의 사도직의 독립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즉, 자신의 사도직을 인정받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사도의 직을 감당하기 위하여 흉년으로 인해 어려움 당하는 형제들을 위한 부조 전달을 위해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었고(행11:29), 따라서 사도들과 교제하거나 다른 일을 보지 않았다.

 

행전 15장에 언급된 할례 문제를 공적으로 다루기 위해 예루살렘 공의회가 소집되었다(행 15:2-7).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이방인으로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받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었으나, 할례를 받지는 않았다. 유대로부터 온 어떤 형제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주장하여, 그들과 바울 사이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안디옥교회는 이 문제를 확정 짓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대표를 바나바와 바울을 파견하였다(행 15:1-2).

 

바울은 교회를 통한 외부적인 역사와 자기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만사를 자기 생각이나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아 뜻대로 행하였다(행 20:22). 바울이 할례 문제를 공의회에 제출하기 전 먼저 유명한 자,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사사로이 그 문제를 토의했다(9절). 그 이유는 중대한 문제를 갑자기 제출하면 혼란과 분쟁이 생길 우려가 있으므로, 사전에 충분한 설명을 하고 충분히 기도한 후에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2) 일시라도 진리를 양보하지 않음 (3-5)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할례와 관계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즉, 믿음으로 구원얻는 진리를 세우기 위하여 일생 동안 달음질하였다. 그런데 할례를 받아야 구원 얻는다면, 이 진리가 헛된 데로 돌아가게 되므로 이 진리를 세우기 위하여 그들을 만난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하였다(행 16:3).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요,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는데(행 16:1),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이유는 할례가 구원문제와 상관이 없는 때에 전도의 장벽(방해물)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받지 않는 이방인과는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도의 경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었으나 디도에게는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이유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므로 할례를 행하거나 행치 않거나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갈 5:6). 그러므로 만일 디도에게 할례를 행했다면. 율법주의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기 때문에 바울도 할례를 행했다”라고 악용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 7: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할례와 같은 율법적 의식을 행하거나 행치 않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하였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할례 여부와 상관없이 구원 얻는데 지장이 없고, 또 받았다고 하여도 아무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들어온 자는 거짓 선지자들로 교회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비밀히 들어왔다는 뜻으로, 이리가 양의 가죽을 쓰고 들어 온 것처럼, 성도를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게 하려는 자들이다. 거짓 형제는 예수를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나 참 복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거짓 형제라고 했다. 거짓 형제들은 성도가 가진 참된 자유를 빼앗고 율법과 자기들의 종으로 삼기 위하여 바른 진리를 파괴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신앙은 한 번이라도 양보하면 죽는다. 바울은 예수를 영접한 이래 일시라도 비 진리, 다른 복음에 복종하지 않았다. 만일 바울이 한 번이라도 복종하면, 거짓 선지자들은 그것을 선전의 재료로 삼고 바울도 자기들과 같다고 주장하여 바울이 전한 바른 복음을 무너뜨릴 것이다. 참된 진리를 세워나가려면 일시라도 비 진리에 복종하면 안 된다. 진리를 양보하고 비 진리와 타협하면 신앙이 죽는다. 신앙의 정조를 한번이라도 양보하지 않을 때에 생명이 있다(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미혹하는 자들은 언제나 한 번 만이라고 미혹한다. 그러나 성도가 신앙의 정조를 한번 빼앗긴 후에는 아무 힘이 없다. 마치 삼손이 신앙의 정조를 잃고 머리를 깎인 다음에는 아무 힘이 없고 블레셋 사람들의 종살이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절대로 진리를 양로하지 말고 신앙양심을 써 나가야한다.

 

4)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 함 (11-14)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 와서 바울과 바나바와 기타 유대인들과 안디옥 교인들이 같이 음식을 먹었다. 이렇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자리에서 먹게 된 것은 율법에서 해방되어 믿음으로 얻은 자유의 열매였기 때문이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할례파 기독교인 몇 사람이 안디옥에 내려왔는데, 베드로가 무할례자와 함께 먹었다고 그들이 비난할 것을 두려워하여 안디옥 교인과 함께 음식 먹지 않은 척하며 물러갔다. 베드로의 이 행위는 분명히 외식이었다. 베드로는 전에 ➀이방인이 믿음으로 깨끗케 된다는 계시를 받아(행 10:10-29),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이나 하나님께서 속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말라"고 주께서 지시하셨으므로 사양치 않고 왔다고 하였으며, ➁이 일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증거 했다(행 11:5-17). 또 ➂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할례와 상관없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증거 했다(15:7-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런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취하였다. 베드로의 이같은 행동을 보고 남은 유대인들과 바울의 통역자인 바나바도 베드로와 같이 돌아앉고 말았다. 이에 할례받지 않고 믿던 안디옥 교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되겠다고 오해학[ 되었다. 이 외식 행위로 인하여 바울이 지금까지 전한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바른 진리가 일거에 무너지게 되었다. 따라서 바울이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은 베드로르 면책하였다. 성도는 진리를 위하여야 한다(고후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바울은 진리를 파수하는 일에는 선후배, 노소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진리를 무너뜨리는 베드로를 책망하고 진리를 밝혔다. 베드로는 유명한 사도이나 그의 체면보다 진리가 더욱 크고 귀중한 것이다.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 사람과 함께 먹기도 하고 함께 교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과 같이 먹지 않는 것처럼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방인을 억지로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는 위선된 행동이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게 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모든 성도들이 의롭게 되는 것도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먹었는데 그 행위가 죄라고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도록 한 결과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의식주의를 다 헐어버리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가 되도록 하였는데, 할례와 같은 율법적 의식을 다시 세우면, 즉 다시 주장하거나 요구하면 자기가 자신을 변절자로 만드는 일이다. 또한 그 전에 이방인과 함께 먹은 일도 범법한 일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자신을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 된다.

 

 

二. 믿음으로 사는 성도 (19-22)

1) 율법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께 향하여 사는 자. 주인)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율법의 요구(613 가지)대로 다 행하지 못했으므로 죄인이며, 죄 값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판단으로 죽은 자였다. 그러나 죽어야 할 우리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형을 받아 죽은 자이며, 이미 죽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영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난 것이다(중생).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는 이러한 율법이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즉 율법에 대해서는 죽은 자와 같고, 이제는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그를 사모하며 사는 자가 되었다. 주인이 바뀌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성령의 사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와 함께 법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다(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하나님께서 내 죄를 인하여 내게 사형 언도를 내리셨는데 ,그 사형 집행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내 죽음이다. 그때에 육체와 정과 욕심도 못 박았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자기 대신 예수께서 죽으셨으므로 이는 곧 자기가 죽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까이 하여 동행한 것만큼 육체의 소욕이 적어지고 정과 욕심이 죽어진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서 점점 더 살아서 역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고 성령의 열매 맺는 생활을 잘 하여야 하늘나라에 가서 상급이 크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택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믿는 성도의 영혼을 살려 놓았다. 믿는 자는 다 영혼이 산 자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자가 되어야한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예수와 함께 죽은 자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의를 인하여 산 자이다. 우리가 산 것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만 주를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3)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자이다 (주님 안의 삶)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접붙힌 것같이 성도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이 되었고 그 생명의 역사로 성도의 영이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의 영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세계 안에서 산다. 즉,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서 구속하여 살려 주신 영적 생명으로 산다는 뜻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포도나무의 진액을 받을 수도 없고 생명이 살 수도 없으며, 열매 맺을 수 없다(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에 생명의 교통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이 된 성도는, 그리스도를 떠나 살 수 없고, 예수님과 영적 교통이 계속되어야 심령이 살고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과 영적 교통이 끊어지면 심령이 메말라서 죽은 가지와 같이 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액이 공급되어 열매를 많이 맺게 된다.

 

4)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 (주님만 의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살지만, 나는 ➀ '나' 대신에 '그리스도', ➁) '율법' 대신에 '믿음', ➂) '옛 사람' 대신에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아직도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성령을 좇아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롬 8:4).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직도 내가 육체 가운데 살고 있지만, 내 영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그의 생명에 참여하여, 중생한 영이 날마다 자라나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점점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생활이다. 만약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도 그리스도의 구속도 필요 없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 되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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