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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5 10:08

방언의 성경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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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성경적 이해, 김영완

 

방언의 성경적 근거

 

방언의 정의

방언의 헬라 원어 γλωσσα (글로싸)는 "혀, 말, 언어"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한 개의 방언으로 말했으나 청중에게 들리기는 그들의 살던 각국 방언으로 들렸다는 해석이 있고, 다른 하나는 그 때에 제자들이 거기 모인 청중들이 대표한 각국 방언으로 말했다는 해석이 있다. 사도들은 갈릴리 출신으로 다른 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메데와 메소보다미아와 애굽과, 구레네와, 로마말로 전도할 수 있게 하셨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와 사도교회 시대에 교회 안에 있었던 방언들은 모두가 특별한 언어로써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의사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방언을 주신 목적

사도시대에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특별게시의 전달과 확증을 위한 것이었다. 특별히 방언을 주신 목적은 아직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이전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것이었다. 데이비드 롱(David Long)은 “오늘날의 방언들“에서 방언의 목적을 첫째 고전 14장 22절은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이다. 둘째 특별한 뜻을 알게 하고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목적은 믿는 자들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 14:4).

 

방언의 종류

첫째, 배우지 않은 다른 나라 말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배우지 않은 다른 나라 말로 전도한 것이다. 제자들은 자기 나라 말로 말하였으나 듣는 사람이 각기 저희나라 말로 들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제자들이 자기 나라 말로 말하였다는 증거가 없다. 제자들이 다른 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지만 성령께서 다른 나라 말로 전도하도록 능력을 입혀 주었다. 성령님은 모든 나라 말을 들을 수 있고 말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다 갈릴리 사람이었지마는 메데와 메소보다미아와 애굽과, 구레네와, 로마말로 전도하게 되었다.

 

둘째,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고전14:2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할 수도 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통역이 없을 때에는 교회에서 하지 말라고 하였다(고전14:28). 통역이 없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 안에서 하게 되면 말하는 자도 야만이 되고 듣는 자도 야만이 된다. 그 이유는 ①덕을 세우지 못한다(고전14:5). ②유익이 안 된다(고전14:6). ③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한다(고전14:7). ④나팔이 분명치 못하므로 전쟁을 준비할 수가 없다(고전14:8). ⑤허공에다 말하는 것이 된다(고전14:9). ⑥야만이 된다(고전14:11). ⑦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전14:14). ⑧방언으로 기도하면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함으로 감사할 수 없다(고전14:16). ⑨일만 마디 방언하는 것이 깨달은 성경을 다섯 마디 말하는 것보다 못하다(고전14:19). ⑩방언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하여 있는 표적이다(고전14:22). ⑪무식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보고 미쳤다고 한다(고전14:23). ⑫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닌데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 된다(고전14:33).

 

방언을 통역하는 일에 대하여

방언을 통역한다고 하는 사람 중에 거짓 통역자가 많다. 그러므로 참 통역자인지 아닌지 시험을 해보아야 안다. 시험할 때에는 한 사람이 방언을 말하고 두 사람 이상이 통역을 하되 음성을 내지 말고 그 내용을 종이에 기록하도록 하고 그 기록들을 대조해 보아서 꼭 같지 않으면 참된 통역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방언을 금하지는 말고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하였다(고전14:39).

고전 14:27-28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셋째, 새방언(막16:17).

새방언은 성경말씀을 새롭게 깨달아 자기 나라 말로 말하는 것이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달은 것은 처음 듣는 말이요 그 내용이 새로운 말이다.

 

방언의 출처도 세 가지가 있다.

①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있다.

②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 자기 마음에서 방언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자꾸 연습을 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나오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방언을 해야 된다고 하고, 자기도 방언을 하려고 애를 쓰면서 며칠만 노력을 하면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참 방언이 아니다.

③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 마귀가 허영심에 날뛰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말을 하게 한다. 이러한 방언을 하는 사람은 마귀의 종이 되고 마침내는 마귀의 일을 하게 되어 교회에 큰 타격과 손상을 입히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방언만 참 방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방언은 성경에 맞는 것으로 맞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방언이 아니다. 성령은 진리의 신이시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방언

첫째는 오순절 성령사건 때의 방언으로 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사건 때의 방언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짧은 시기에만 있었던 단회적인 것이었다. 즉 오순절 성령이 오셨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오순절 때의 방언은 사도들을 중심한 성도들이 다른 지역의 언어들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언어를 배운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출신지방 언어로써 말함으로 각처에서 온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였다. 방언은 실제적인 지상의 언어였다(행 2:6-10)(고전 14:20-22).

 

둘째는 사도시대 교회에서의 방언으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따르면 사도시대 교회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말했다. (고전 12:10)

 

방언의 제한

a. 여자들은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전 14:34).

b. 방언은 순서대로 해야 한다(고전 14:27).

c. 방언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고전 14:27)

d.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전 14:33).

e. 모든 것은 적당하고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고전 14:40).

 

현대교회에 있어 방언의 문제점

은사주의자들의 견해

대부분의 오순절 교파들은 성령 침례가 구원 후에 반드시 구해야 할 체험이며 방언을 말하는 것을 수반한다고 가르쳐 왔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성회의 “기본 진리 선언문”은 “모든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아버지의 약속인 성령 침례와 불세례를 열심히 기대하고 진지하게 구해야 할 자격이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모든 이의 정상적인 체험이었다. 이와 함께 삶과 섬김을 위한 권능이 주어지고 사역의 일에서 은사가 주어지고 그 은사가 사용된다. .이 체험은 새로운 출생과는 다르며 새로운 출생 이후에 온다.

 

한국의 대표적인 은사주의 교회인 기독교하나님의 성회는 방언을 말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①성경이 방언 말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며(막16:7). ②방언이 성도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적인 제한이나 한계를 넘어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이며, ③방언은 한 가지 은사로 여러 가지의 은사를 나타내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라 한다. 조용기 목사는 “방언의 유익”이라는 글에서 “성도의 가장 획기적인 체험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선물로 받는 것이며, 방언은 방언하는 당사자는 물론 방언을 보고 듣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 하였다. ①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임. ②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움. ③방언은 통역할 수 있음. ④방언은 개인예배에 큰 축복이 됨, ⑤방언은 마음의 안식을 가져 옴, ⑥방언은 성령님의 대신 기도임 ⑦방언은 믿는 자의 표적이 된다.

 

선교 사역에서의 방언사용을 주장한 프랭크 샌드포드(Frank W. Sandford)는 "세계를 빠르게 복음화시키기 위해 방언은사는 매우 유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순절 운동은 회심 이후의 두 번째 경험을 특별히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경험은 방언 혹은 고전 12장의 은사 목록에 나타나는 은사들을 부여하는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인간이 성령의 충만을 입을 때 반드시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되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방언이라는 것이다. 방언은 가장 다스리기 힘든 인간의 혀를 성령이 지배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므로 성령이 충만히 임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능력 세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증거와 연관되므로 방언과 같은 은사의 수반 없이도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따라 성도들에게 임하신다, 성경의 모든 은사가 성령의 뜻에 따라 베풀어진다 해도 우리 신자들은 이 은사들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공익을 위하여 통제(control)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대 방언의 문제점

1. 초자연적 은사의 소멸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는 사도시대에만 속하고 그 후시대에는 중지 또는 폐지되었다는 것은 신약 시대 교회들이 전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주후 4세기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대주교장이었던 크리소스톰은 고린도전서 설교에서 방언은 이미 그쳤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주후 5세기 초 유명한 어거스틴도 요한일서 설교에서 방언은 유대 기독교인에게 주신 초기 표적이었고 이전 시대에 이미 사라졌다고 가르쳤다(Beale). 칼빈도 사도행전 10:44 주석에서 ‘방언의 은사와 및 그 밖에 그와 같은 것들은 교회에서 오래전에 중지되었다“고 말했다. 방언을 포함한 초자연적 은사의 소멸은 그 목적이었던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과 확증이 사도시대에 신약성경의 기록이 완성됨으로써 다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은사운동은 아직도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전반적 혹은 회복을 주장하나 이는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는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한 대로 방언이 성령의 능력세례를 받은 증거라고 한 것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인 것이다.

 

2. 방언의 일반화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이며 모든 신자는 필수적으로 이 은사를 받아야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방언을 포함한 모든 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요구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아래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진다(고전 12:11). 고전 12:29-30에 누구나 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신자가 이 다 방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 성경 말씀에 위반되는 것이다.

 

3. 방언의 훈련 (신천지 추수꾼들의 방언-교회에서 믿음 있는 자로 보이기 위해)

오늘날 흔히 방언을 받기 위한 훈련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인위적이고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방언사례들은 결코 훈련을 통한 것이 아니었고 방언하기를 구하지도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은사를 인간적 훈련으로 받게 하려는 것은 거짓된 행위이며 하나님에 대한 모독행위이다.

 

4. 방언의 통역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 바울은 통역이 없을 때에는 교회에서 하지 말라고 하였다(고전14:28). 통역이 없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 안에서 하게 되면 말하는 자도 야만이 되고 듣는 자도 야만이 되기 때문이다.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을 말하지 말고 잠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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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완성으로 초자연적 은사가 소멸한 오늘날, 현대의 방언을 사도들의 역사로 나타났던 그 시대의 방언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 특별히 방언받기를 사모하지 말고 그것들을 구하지도 말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직 신구약 성경 66권의 말씀만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우리 신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으면 된다.

성령 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방언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이며 성령 세례를 받은 자의 외적인 표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에서도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 방언하는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방언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다 초대교회 특히 고린도 교회에서도 방언에 관련된 문제가 야기되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을 받은 사람이 받지 못한 사람을 영적으로 무시하며 영적인 교만에 빠져있었다. 마치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대우하였고 급기야 그것이 교회의 문제가 되었다. 이에 바울은 고전 12장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1.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은사는 다르나 성령은 같다.

어떤 이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병고침의 은사 등등 다양한 은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말한다. 마치 한 몸에 여러 치제가 있듯이 하나님이 주의 몸 된 교회에 여러 지체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나누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손이 발에게 넌 손이 아니니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은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니다. 모든 지체가 귀면 냄새는 어디서 맡겠느냐? 은사도 이와 같다. 모든 사람이 모든 같은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방언을 받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각 지체에 따라 주의 몸된 교회에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받은 자 만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아니된다.

 

2. 방언을 포함한 성령의 모든 은사는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서14장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방언으로 말하면 듣는 자나 불신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므로 허공에 울리는 소리에 같다고 말하며 방언 통역하기를 사모하라고 한다. 아니면 차라리 자제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오히려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고한다(14;1).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점쟁이처럼 앞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잘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14장 3절에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4:19에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한다. 곧 방언을 받았다고 해서 영적으로 탁월한 사람인양 착각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예언만 못하므로 자랑치 말아야 한다. 모든 은사는 고전 13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랑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사랑이다. 받은 것이 비록 영적인 지식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말씀과 같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

 

3.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한 은사이긴 하지만 방언만이 성령을 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곧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받은 자의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느니라" 곧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역사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없는 것이다. 방언, 병고침, 귀신쫓는 능력 모두 귀중한 성령의 은사이지만 이것이 성령을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도 이런 것들을 행하고 어둠의 자식들에게 이런 현상은 얼마든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에서 말씀한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유독 방언만이 성령을 받은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방언을 받아야 하는 이유

은사는 받겠다고 해서 다 받아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 은사를 사모하고 오랫동안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 은사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가 하나 있다. 방언의 은사는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주신다. 방언의 은사는 누구나 받는 은사이고, 누구에게나 주시는 은사이고, 누구나 받아야 하는 은사인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매우 흔한 은사이고,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주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아주 귀중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1) 방언은 나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이다.

2)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나의 영이 나도 모르는 것을 기도한다.

3) 방언은 신령한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4) 방언은 다른 신령한 은사로 통하는 문이다.

성령의 신령한 은사, 예언, 병 고치는 능력, 능력 행함의 은사 등 은사를 받은 사람 중에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말하자면 방언은 신령한 은사로 들어가는 활짝 열린 문인 것이다. 방언을 받지 못하고는 다른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5) 방언 기도하는 것에 의해서 영이 자란다.

 

방언을 받는 방법

방언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간절히 사모하며 주야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본인의 입으로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은사가 임하는 즉시 본인이 그것을 알게 된다. 방언은 반드시 기도하는 중에 받게 된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방언이 터져 나오는 일은 절대로 없다. 때문에, 평소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방언의 은사는 결코 임하지 않는다. 방언 그 자체가 기도하기 위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오래 믿고도 방언도 받지 못한 사람은 대개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방언의 은사는 속으로 묵상 기도를 할 때에도 임하지 않는다. 크게 소리 내어 외치며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가 임한다. 혼자서 기도할 때보다도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큰 소리를 내며 열정적으로 기도할 때에 방언의 은사는 더 잘 온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큰 소리로 기도를 해야 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도원에 가거나 금요 철야기도나 은사 집회 등에 자주 참석해서 모두들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할 때, 그 속에 끼어 힘을 다해 큰소리로 외치며 기도를 해야 한다.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외치며 기도할 때 방언이 갑자기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다른 것을 위한 기도를 정신없이 하고 있을 때 예기치 않게 방언이 터져 나오는 수가 많다.

 

처음 방언은 어떻게 터져 나오나?

입술이 비틀리거나 혀가 경련을 일으키거나, 혀가 굳어져 입천장에 올라붙거나 하여간 발성 기관인 입술이나 혀에 갑작스런 이상이 생겨서 이상하고 묘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이게 방언이다. 방언의 은사가 임한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이 있다. 방언의 은사가 왔구나! 하고 입술과 혀의 움직임을 멈추면 안 된다. 계속 입술과 혀를 놀려야 한다. 계속 입술과 혀를 움직여 소리를 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정신없이 땀을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뜻도 모르는 소리를 질러대야 한다. 이렇게 1분이고 2분이고 계속하고 나면 이제 방언의 은사하는 내 것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다음은 연습을 해야 한다. 시간 나는 대로 혼자 앉아서 소리를 내어 방언하는 연습을 하며, 또 여러 사람들이 모여 큰 소리로 통성 기도를 할 때, 특히 방언으로 기도를 할 때, 그 틈에 끼어 방언 기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 때고 마음만 먹으면 방언을 자연스럽게 술술 나오도록 연습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소리 내는 연습이 되면 다음에는 그 소리에 내 마음의 간절함을 싣는 연습을 한다. 이상한 소리만 내는 것이 방언 기도는 아니다. 마음속의 간절함을 그 소리에 실어 드리는 것이 방언 기도인 것이다.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방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있다.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방언이란 시동을 걸어 놓은 자동차 엔진처럼, 가만히 있어도 방언이 저 혼자 나오는 것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고는 이제 입속에서 방언이 나오나 안 나오나 입 다물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방언의 은사는 받지 못한다. 방언의 은사는 입술이나 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심령 속에 오는 것이다.

 

처음 방언이 터져 나올 때, 입술이나 혀가 경련을 일으키거나 마비되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께 이제부터 너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노니 앞으로는 방언으로 기도를 해도 좋다, 하는 하나님의 신호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신호를 통해 내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 힘으로, 나의 의지로 내 혀와 입술을 움직여 방언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방언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그게 하나님의 은사냐? 하고 물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방언이란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에 실려 올라가는 나의 영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방언은 가만히 있는데 저 혼자 줄줄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바로 이것을 이해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면 그게 무슨 은사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방언은 바로 그런 은사인 것이다. 방언은 뜻 모르는 소리를 지껄이는 은사가 아니라,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인 것이다. 소리는 내가 내는 것이다. 소리는 내가 의도적으로 내지만, 성령께서 그 소리에 영들은 듣고 아는 “뜻”을 실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다.

 

방언은 소리에 그 뜻이 있지 않다

아직 방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방언을 이미 받아서 방언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방언할 때 내는 소리 그 자체에 뜻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마치 인간들의 언어처럼 소리나 소리의 순서에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지만, 방언 기도를 할 때 내는 그 소리 자체에는 아무 뜻도 없다. 랄랄랄 하든 룰룰룰 하든 또 뭐라고 하던 소리 그 자체에는 아무 뜻도 없다는 말이다. 필자도 처음 방언을 받았을 때에는 소리 그 자체에 어떤 뜻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영이 하나님을 향해 영 자신의 의지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다. 내가 방언 기도를 하며 내는 소리는 단지 나의 영이 지금 기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밖으로 들어내고 있을 뿐, 내 영이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기도의 내용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입으로는 랄랄랄랄 하고 한 가지 소리만 하고 있어도 기도하는 영은 하나님을 향해 온갖 내용의 기도를 다 드리고 있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방언을 가르친다.

반면, 방언을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에 의하면 방언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인데 어떻게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사람이 노력해서 그것을 배울 수도 없고 또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하나 있다. 방언의 은사가 바로 그것이다. 방언의 은사만은 배워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 방언의 은사만은 배워서 할 수가 있는가? 사실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방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의 은사가 이미 와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은사가 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느껴도 방언을 하는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사람들에게 방언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을 가르친다는 것은 방언의 은사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은사를 입으로 내서 말할 수 있게 소리 내는 연습을 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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