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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5 09:50

김현봉 목사(1884-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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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봉 목사 (1884-1965) - 엄두섭 글

 

평생 예수님의 청빈과 순결로 목회하신 분이다. 김현봉목사는 평양신학교를 나오고, 한 때 서울 아현동에서 기성교회 목회를 했으나, 교회 장로들 때문에 실패하고 교회를 사면하고 나와 마포구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7명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닭장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으며 계속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검소하게 살았다. 별세 할 때 1,000명의 교인이 있어도 그의 생활은 거지에 가까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우리 나라 기독교 최초 선교사가 들어오던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김현봉은 태어났다. 형이 한 명, 누나가 한 명 있어 막내로 자랐는데, 아주 어릴 때 서울 서대문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세 친구와 함께 동대문 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예배가 마친 후 목사께서 청년 현봉의 손을 잡으면서 ‘다음 주에 꼭 오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예’하고 대답을 한 것이 예수 믿게 되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0년 8월에 한일합방이 되자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하던 애국청년은 1912년 월남 이상재의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중국 서간도 땅으로 건너갔다. 교포 2세를 위해 한국학교를 세워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다시 러시아 영 삼위로 옮겨 학교를 세우고 한국말과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옥중 생활 중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게 되었다.

 

1923년 출감해서 이듬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독립운동에 구체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40세에 신학생이 된 김현봉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학생 시절에 광명리 교회, 시흥군 서면 한이 교회, 구읍 교회, 군포장 교회, 안양 붙임말 교회, 수원 학현교회 등을 차례로 돌보게 되었다. 재학중 1927년 그의 나이 44세에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이었던 28세 처녀 박천선과 결혼했다. 드디어 1928년 제2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공덕리 교회를 맡게 되었다. 경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후에 공덕교회를 사임하고, 1932년 3월 31일 아현동 37번지에 일곱 사람이 모여 아현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터는 아현동 37번지는 공동묘지였으며 큰 소나무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 일본의 경제개혁 실패로 농민들이 몰락하게 되자, 소작농민들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사상태에 빠져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못해 일본, 만주 등으로 흩어지고, 국내에 있던 농민들은 대도시로 몰려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보려고 했다. 이들 중 일부가 아현동으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김목사는 이곳에서 집 짓는 일을 도와주기로 하였다.

 

1925년 일제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건설한 것을 시발로 해서, 1930년 들어서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압박에 못 이겨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김현봉 목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하였다. 교회에는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다. 목사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 후에도 계속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비가 오면 검은색 우산을 쓰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 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200명 넘는 교인이 되자 부엌을 헐어내고 4칸 마루와 건너 방을 터서 예배실을 늘렸다. 6?25가 발발하자 김목사는 삼각산에 들어가 39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기도 중 회개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은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을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 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했다고 한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간다.

 

70의 나이에도 상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토요일에는 쌀밥과 고기 국을 끓여 배고픈 이웃을 대접하였다. 그래서 아현교회에는 주일날 시내의 거지들이 다 모여들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줄로 서게 하고 100원씩 주어서 보내기도 했다. 이때 교인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그는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교인이 늘어나면 자기가 손수 교회의 벽을 헐고, 예배당을 넓히면서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

 

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 광선이 잘 들고, 예배드리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교회가 산비탈에 있었기에 늘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윗덩이를 일일이 깨 가며 예배장소를 확장했고, 기둥이 많아 일명 ‘기둥 교회’, 초라하여 ‘누더기 교회’의 별명이 있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다. 그러면서도 전 교인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연보는 김목사 자신이 관리를 하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한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전도와 구제하는데 쓰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헌금은 진정한 영혼을 길러 주기 위해 수고하는 인근 교역자들과 신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교단에 들어가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었다. 목사의 사례금은 교회에서 정해지지 않고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는 별도로 연보함을 만들이 교인들이 자유로이 넣도록 했다. 주일날은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모가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 교인에게 대접했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저녁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린아이는 자전거 뒤에 싣고 장사하고, 어른은 리어카에 실어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사경회 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신랑 신부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불러 앞자리에 세우고 “잘 살겠소?” 하고 묻고 기도해 주면 끝이다.

 

김목사는 자신이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하고 교인을 늘려갔다. 다른 교회에서 불만이 있어 찾아오는 떠돌이 교인은 받지 않고, 김목사 친히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교회를 만들어가며 성장을 시켰다. 70세 넘어 81세 별세할 때까지 그의 목양 일은 계속 하였는데 교인수가 1200명까지 되었다. 예배는 두 시간이나 길게 드리는데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다. 그 교회 남자 성도들은 김목사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바지저고리 입는 이가 많았다. 김목사는 키가 작으며, 삭발하고 항상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의 별명이 “중목사”라 했다.

 

그 교회의 여자들도 사치한 색깔의 옷은 입지 않고 한동안 머리에 파마도 못하게 했다. 모든 형식을 무시하고 김목사는 때때로 강대 위에서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아가면서 설교를 했다. 사경회에 다니다가 힘들 때는 강대상 위에 올라가 타고 앉아서 설교하기도 했다.

 

김목사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를 써서 그의 감화를 받고 김 목사를 따르던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중에 이병규(신촌), 백영희(부산 서부교회), 안병모, 이한영, 안길옹(알래스카에서 개척교회) 등이 있다. 안길옹목사(2001년 현재, 85세)는 노인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 공터에 있는 곳에 창고 같은 건물을 지어두고 매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머물면서 기도하며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생활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그의 아들인 안정남목사(나성 성약교회)도 김현봉 목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대한 정보는 임형태 목사(콜로라도 스프링스한인장로교회)께서 제공해 주셨다.

 

김현봉목사의 사생활은 저녁 5시경이면 잠자리에 들고 밤 12시에 기상해서 고요히 단좌해 묵상에 잠기고 새벽 4시 통행 금지가 해제되면 연세대학교 뒷산에 작게 마련한 기도실 마당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묵상에 들어간다. 낮 12시까지 그런 모양으로 머문다. 오후에는 심방을 다녔는데 아현동 일대에 교인들 집을 하루에 70호를 심방하는 때도 있었다. 교인 집에는 일일이 들어가 앉아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서 “별일 없소?” 묻고 지나가고 간혹 가난한 교인 집에는 부엌에 들어가 연탄불이라도 피웠나 해서 방바닥에 손을 대보는 것이 심방이었다.

 

1965년 3월 12일 오전 9시 50분 81세의 일기로 김현봉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별세하셨다. 장례식은 늘 따르던 이병규 목사(신촌 창광교회, 계약 신학교를 운영함)가 집례했고, 시신은 생전 김목사의 정신에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다. 그 뒤를 1200성도들이 따라 갔으며, 시신은 화장을 했다.

 

 

 

■ 김현봉 목사의 설교 세계 - 송광택

 

1. 생애(약력)

 

김현봉 목사(1886-1965)는 서울에서 출생하였다(장로교 목사). 1906년(22세) 동대문 감리교회에 3인과 함께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912년 양정의숙 법과 졸업 후 배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일합방 이후 줄곧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감시를 피해 월남 이상재 선생의 소개장 들고 중국으로 망명하여(1912-1923) 북간도와 러시아 영토를 두루 다니며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중국어, 러시아어 능통).

 

1923년 귀국시 서을역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에 누님과 생질이 보증을 서 보석으로 풀려났고, 출옥한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39세). 평양신학교 재학 중(1923-1927) 평북 정주교회, 관악 보리말교회, 시흥 구읍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23회)하고 192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6월 16일 세브란스 간호원 출신의 박천선(朴天善)양과 결혼하였다(사모님은 1924년 진명여학교 졸업, 1944년까지 간호사 일). 그후 경기노회 소속으로 경기도 시흥군에 있는 부림교회에 부임하였고, 경성노회로 이적하여 서울의 공덕교회에서 시무했다. 1932년 3월 30일 성수주일 문제로 공덕교회를 사임하였고, 1932년 4월 20일 7인과 더불어 서울의 아현정(阿峴町)교회(아현에배당)를 창립하고 목사로 취임한 후 38년간 계속 시무하였다. 1964년까지 전국 각처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특히 총회에서 신학교 문제로 분열되는 상황에 직면하여 독립교회를 표방하였다(1953년 고려파 38회 총회에서 제명됨). 1965년 3월 12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참고/ 기독교대백과사전 제3권, 313쪽; 자료-안길옹 목사 제공)

 

2. 목회 방침과 교훈의 특징

 

1) 찬양대, 학생회, 청년회 두지 않았다(교회 사업주의 반대)

2) 주일성수 강조

3) 자발적 연보 가르침

4) 친목회, 야외예배, 망년회, 찬양새벽송, 어머니주일, 약혼식 폐지

5) 국산품 애용 강조

6) 삼분설 주장

7) 천국은 다 평등이 아니다(천국에서는 큰 자와 작은 자가 있다)

8) 목회, 치리, 재정, 유년주일학교, 심방 전담.

9) 한복을 즐겨 입으심.

10) 밥을 먹으라고 했을 때 먹었다고 하면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11) 하루 7-8시간 기도하셨다(15일을 앉아 계신 적이 있다고 함)

12) 점심은 항상 국수를 하시고, 국수를 대접하셨다.

13) 하루 수면 시간은 3-5시간뿐이다.

14) 오전 시간은 기도, 성경공부, 오후는 심방과 전도와 교회 일을 하셨다.

15) 장례는 리어카로 운반(심지어는 관이 없어도 무방)

 

3. 메시지

 

1) 10대 특수 교훈

 

(1) 삼가하고 조심하라

(2) 양심을 똑바로 써라(양심과 말씀에 순종하는 정신을 가지라)

(3) 일심정력

(4) 구원을 이루라(성화구원)

(5) 명예 영광심을 버리라

(6) 나 하나 만들라

(7)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풍속습관을 버리라.

(8) 지식중심주의를 버리고 믿고 실행하라.

(9)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살라.

(10) 개교회주의

 

2) 그밖에 강조하시고 가르치신 말씀들

 

(1)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묵상하라

(2) 예수 믿는 것은 남을 위하여 믿는 것이다

(3) 교회 직원 많이 내지 말라

(4) 참되고 진실되고 정직하라. 옳고 착한 일을 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고 참고 견디고 덕을 길러라.

(5) 겉 사랑하지 말고 그 영혼에게 참 유익을 주는 참 사랑을 하라.

(6) 물질적 신앙적 자립정신을 길러라.

(7) 교회사업주의를 버리라.

(8) 결혼식 간소화

(9) 물질(돈, 전기, 의복, 음식, 건물)을 절약하고 남용치 말라.

(10)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믿는 도리를 가르치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라.

(11) 쉬운 것부터 믿고 실행해 나가라.

(12) 들어오는 대로 종횡으로 열을 맞추어 앞자리부터 앉아라.

(13)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고 고요한 장소를 찾아 기도하라.

(14) 이자놀이 하지 말고 계하지 말라.

(15) 강단을 꾸미지 말라(성경을 올려놓고 강도할 수 있으면 족하다).

(16) 예배시간을 엄수하고 약속을 지키라.

(17) 찬송가를 뜻을 생각하며 불러라.

(18) 혈기를 이겨라.

(19) 극장가지 마라.

(20) 우상의 제물, 피, 목 매여 죽은 짐승 먹지 말라.

 

3) 목사에 대한 교훈('택함 받은 일꾼의 자격과 신덕', 딤전 4:10-16)

 

택함 받은 일꾼은 열심과 힘을 드리며, 양을 자기의 뼈와 살과 같이 사랑하여 교인과 목자가 통하게되는 것이다. 참된 일꾼은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이 쏟아져 나오고 피땀이 섞이어 나오는 것이다. 목자를 알아서 따라온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양들에게 보이어야 할 것이니 영혼의 키가 장성하는 것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덕이 자라고 선의가 더욱 자라나는 것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묵상, 성경 보는 일, 기도, 궁구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일, 잘 해야 한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면 먼저 자기가 은혜를 받는 것이며 연단하는 것이다.

 

전심전력을 강도에 기울여 해야 하는 것이다. 몇 시간 준비해서 하려고 하는 것은 품팔이 일꾼인 것이다. 교인이 온 것은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왔는데 굶어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연구가 부족하고 궁구가 부족하고 정도가 유치해도 일심정력을 기울여 공만 들이면 그 강도(講道)는 하나님이 가르치게 하는 것이다. 강단을 아무나 가르치게 양보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 번 이단을 가르쳐 놓으면 여독이 심하다.

 

일꾼이 되려면 먼저 믿고 말씀을 사랑하고 자기가 먼저 실행하고 자기를 만들어 정직하고 진실하고 사람이 되어 가르칠 때에,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아서 믿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실행치 않고 입으로만 가르치니 마귀의 종이요, 자기가 되지 못하고 가르치니 못된 것 가르쳐 놓으니 결단날 일만 해놓는 것이다. 일꾼이 된 자는 피땀을 흘리지 아니하고는 못하며,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피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실행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얼마나 실행하는가? 앵무새와 같이 가르치고 지식으로만 배워서 가르치니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도를 가리우는 것이다.

 

교인의 사정을 함부로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은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른이고 인도자인데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 나오는 자를 모두 성자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너무 다 잘 만들려다 낙심하기 쉬우니까 교인의 처지를 보아서 차차 잘 인도해야하며, 자라기를 바라고 길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완전하여도 쓰시는 것이다. 쓰되 길러가면서 쓰시는 것이다. 자기가 의로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될 것이며 회개하고 바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진저. 목자는 파수꾼이요 목자이니 나보다도 양을 위하여 바로 자기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본능이며, 내가 희생하는 것이 교인을 살리는 것이며 즉 나를 살리는 것이다. 교역자는 교회 일을 볼 때에 사람을 의지하여 일하면 안되고 하나님과 손을 잡고 일을 해야 한다. 사람을 의지하니 하나님은 배척하고 사람이 교회를 세우려하니 되지 않는 것이다. 교역자는 남의 생명을 맡은 자이니, 육신의 오락을 취하지 말고 희생해야 한다.

 

자기가 연구해서 가르치는 것이 은혜가 되고 힘이 된다. 강도를 할 때 은혜를 받아 신자가 좋아한다. 그러면 자기가 잘 한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 감동인가, 행위가 변화하는가 보라.

 

4) 장로에 대한 교훈

 

장로가 교회를 지어서, 쥐고 펴고 하는 것이면 이는 장로가 할 일이 아니다. 장로가 교회의 주인도 아니며 목사도 주인이 아니요, 주인은 그리스도인 것이다. 금일 장로는 주인이요 목사는 품팔이꾼이 되는 것이다. 목사가 만일 장로를 책망하면 받지 않고, 목사를 쫓아내는 것이다. 장로는 목사의 조력자이다. 현재 장로는 권세를 부리고 교회주인 노릇하여 일꾼 내쫓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다. 장로가 장로 일을 못하면 장로가 교회 분쟁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5) 전도부인(전도인)에 대한 교훈

 

이북에서는 권사, 이남에서는 전도사라는 명칭을 교회에서 결정하였다. 현재 전도 일 안 하는 자를 성직 명칭으로 부르지 말라. 가난한 집에는 더욱 자주 가야하며 돕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니되 입이 무거워야 하며 필요 없는 말은 아니해야 한다. 흠점이 보이거든 자기가 권면하여 들을만 하면 하되 못할 것 같으면 목사에게 말해야 한다. 목사의 흠집을 교인에게 말하면 안 된다. 목사의 잘못이 있으면 직접 와서 목사의 잘못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거든 자기가 거기 있지 말고 다른 데로 가는 것이 낳으며, 목사를 추방하는 것이 성공했다 할지라도 후에는 벌받고 자기도 쫓겨나게 될 것이다. 충실히 일하지 않으면, 섭하지만 보내야 한다. 정이나 체면을 못 이겨서 두어두면 그 사람 망하고 교회 망하는 것이다. 전도인은 목사의 신앙 사상과 같아야 되는 것이다. 사상이 같지 않으면 진리의 혼란을 갖게 될 것이니 안될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그 밑에서 전도 일을 할 마음이 있으면 신앙적 사상과 은혜를 받고 마음으로 주안에서 심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6) 신자에 대한 교훈

 

부모는 육신을 기른 자이나 일꾼은 나의 심령을 기르는 자인 줄 알고 영혼의 선생인 줄 알고 고맙고 감사함으로 배워야 한다. 실행하기 위해 배워라, 말씀을 지식으로만 배우게 되면 양심의 자유를 못 누리니, 듣고 실행해야 한다. 예수 믿는 데 폐물된 사람, 아무데 가나 사람 노릇 못한다. 이 좋은 교훈 배우지 못하는데 어디 가서 사람 노릇하는 것 배우겠는가?

사람노릇하려면 용서하고 참고 견디고 용납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교회 일 잘 할 수 없는 것이다. 책망과 옳은 말을 해주면, '고맙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지 아니했으면 캄캄한 데 행할 뻔하였는데 가르쳐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할 것이다. 옳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 양심 쓰는 마음, 이것 먼저 만들라. 먼저 마음을 돌이키고 자기 만들어 나가는데 힘써라. 자기가 타인에게 좀 났다는 칭찬을 받는 자, 정신 차려야 한다. 잘못 하면 자기의 의(義) 그것만 의지하니 넘어질까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바른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음식을 먹되, 덕을 세우기 위해 먹고 유익하려고 먹는데 해되게 먹으면 안된다. 먹을 때에는 절제가 있어야 한다. 식물에 대한 절제, 이것도 선한 싸움이다. 기술과 지식만 배워 가지고는 안된다. 인격이 없으면 그것은 악하기 때문에 자기를 망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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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y Im 2022.12.28 13:17
    김현봉 목사님에 관한 기록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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