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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 11:33-40

제목 :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一. 믿음으로 사는 사람

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의 문자적 해석은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가 없다"(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NIV)는 뜻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육신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며,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세상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들을 감당하지 못한다.

 

바울은 빌3:7-9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인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한 바울은, 그 귀중한 것을 얻어 나가기 위해 자기의 소중한 자랑거리들 즉,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는 것을 배설물처럼 스스로 내버렸다. 인륜지대사라고하는 결혼까지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갔다. 그러므로 그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고,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지만 세상은 그를 이기지 못했다.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좋게 여기고 사모하여, 공주의 아들의 지위와 애굽의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잠시 잠깐이면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고 청춘도 가고 건강도 가고 명예, 영광, 권세도 다 간다. 잠깐 지나가는 세상인데 일시적인 죄악의 낙을 누리고 살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모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유익을 헌신짝같이 다 내버리고 믿음으로 그 고난의 길을 자원하여 나아갔으므로, 애굽나라도 바로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33-35절에 기술한 것처럼 그의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역사적 사실로도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이기기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고니산토'(*)는 '정복하다'(to conquer, NIV)의 뜻이다.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갈 때 애굽과 아비멜렉의 세력, 블레셋과 미디안의 세력을 다 이겼다. 언급된 사사들이나 열왕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였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려다가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사자굴에서 나올 수 있었다(단 6:17-22).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 왕이 두라 평원에 시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함으로 풀무불 속에 들어갔다. 그들이 맹렬히 타는 풀무 불 앞에서도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굳건한 믿음에서 나왔다. 기드온도 다위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산 믿음으로 행하였으므로 미디안의 진과(삿7:22-23), 블레셋의 진을 파하였다(삼상17:51). 산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누구나이 세상의 권세나 군대의 세력 혹은 여러 위험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고 승리하여 자신들이 바라던 바를 성취할 수 있었다. 산 믿음으로 행하는 이들을 세상은 감당하지 못하였다.

 

 

二.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는 사람

더 좋은 부활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죽은 성도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고전 15:51-53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그리스도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 좇아 재림하신다. 그 때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일어나고 살아있던 성도들도 홀연히 변화되어 부활체와 같이 되어 공중에 올리워서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살전 4:16-17).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성도들이 신령하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육체로 부활되며, 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 것만큼, 부활 후에 상급으로 갚아 주시고, 서로 다른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것을 사모하며 바라보고 신앙의 달음박질하는 성도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악형을 당하여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많은 환난과 악형을 이긴 자들과 순교자들은, 부활할 때에 더 좋은 영광과 존귀와 상급의 면류관을 받게 되므로, 선진들은 악형을 받을 때에 진리를 양보하거나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고 생명을 내놓고 싸워나갔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부귀영화나 안녕을 위하여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보다 더 좋은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신앙의 선진들을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당하면서도 구차하게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35절의 “악형을 받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에툼파니스데산’인데, 이 말은 북을 뜻하는 명사 ‘툼파논’에서 유래된 말로, 북이나 탬버린을 두들기듯이 죄수를 고문대에 누이고, 먼저 쇠창살로 어깨, 팔, 엉덩이, 다리 등뼈를 쪼개어 두 쪽으로 나눈 후에, 죄수의 앞가슴을 북치듯이 쳐서 죽이는 형벌이다. 마카비 독립운동 때에 90세의 노학자인 엘르아살은, 수리아 관헌이 강요한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하고 ‘툼파노’형을 받았다. 그 때 돼지고기를 먹는 척하고 다른 고기를 먹고, 사형을 면하라는 권면을 거절하고, “더러운 생명보다 차라리 영예로운 죽음을 환영하기 위해 자진해서 툼파노 형틀로 나아가겠노라”고 하며 죽어갔다. 그때 그의 어머니와 일곱 명의 형제들도 함께 툼파노형을 받았다고 전하여진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집권 초기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나, 아첨하는 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혹한 박해로 기독교인들을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기었고,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고, 바닷조개껍질이나 땅위에 박아 놓은 창끝에 눕혀 온갖 종류의 고문을 한 후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캅은. 재판관이 고문과 죽음을 당하느니 개심하도록 충고했다. 이때 폴리갑은 총독에게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하고 거절하고 화형을 당하였다.

 

미가야는 왕과 모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시드기야에게 빰을 맞았으며, 예레미야는 바스훌에 의해 매 맞고 착고에 채워지기도 하였으며(렘 20:2)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고(렘 29:7), 진흙 구덩이 속에 던져지기도 하였다(렘 38:6). 마가야는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스가랴 선지자와 나봇,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순교 당했다. 전승에 따르면 애굽의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을 때, 예레미야가 그에 대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자 유대인들이 돌로 그를 쳤다. 이사야가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여 순교했다는 전승이 있다. 사울 왕이 제사장 아히멜렉을 칼로 죽였다(삼상 22:11-19). 여호야김이 집권할 당시 예언자 우리야가 칼에 죽임을 당했으며(렘 26:23), 로마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며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한'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촉구하였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도망하여 산이나 광야에서 짐승처럼 생활하였다. 카타콤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피난처이며 지하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3세기 이후에 기독교인들의 공식적인 무덤이 되었다. 카타콤은 지하공동묘지로, 박해를 피해 숨어든 초기 기독교인들이 거처가 되었다. 그 중 고대 로마의 국도인 아피아가도 부근에 있었던 칼리스토 카타콤은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지하에 소재하는 묘역만도 4만 5천 평에 달하며, 지하에 그물처럼 파놓은 무수한 갱도들을 합하면 대략 20km가 넘는다. 이 카타콤에는 순교자가 10여명, 교황이 16명,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약 10만여 명이 된다.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면서, 환난 가운데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며 믿음으로만 사는 성도에게 이 세상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성도는 핍박을 받아 광야와 산중과 토굴에 유리하면서도 믿음으로 주님을 발견하고, 교제하며,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상급과 면류관을 받을 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 그들은 주를 위해 받는 핍박을 상급으로 여기며 즐거워하였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하는 성도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와 같은 곳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주되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 이외에 애굽과 같은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세상과 세상의 권세자들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산 믿음으로 더 좋은 부활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어떤 큰 환난과 핍박을 당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악형을 받는다 해도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 나가는 성도는, 세상이 결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결론

1. 믿음으로 사는 사람.

2.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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