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17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본문 : 약 2:14-26

제목 : 온전한 믿음을 가지라

 

一. 죽은 믿음은 행함이 없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호흡하고 활동하는 것처럼, 산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행함이 뒤따른다. 따라서 행함이 없다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없다는 증거가 되며, 가치가 없는 헛된 것이다. 14절에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는 말은, '만약 믿음이 있노라 하고 계속적으로 말만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은 행함이 없는 가식적인 믿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말씀을 떠나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살아서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자기 구원에 어떤 유익도 주지 못한다.

 

믿는 자는 시험 가운데서 인내하며, 정결한 삶을 살고, 말씀에 대해 순종하며 가난한 자를 돌아보며, 차별 없이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고, 다른 이에게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산다. 이런 것이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증거이다. 야고보는 입술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이런 증거가 없는 사람은 죽은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하고 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믿음의 첫걸음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 하였다(마16:16)). 고백은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참된 신앙고백을 기초로 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자기가 고백한 그 믿음의 내용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여 고백할 때 구원에 도달하게 되며(Luther), 고백한 믿음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에 구원이 점점 이루어진다.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닮아 나가는 면을 말한다.

 

믿음은 거듭난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참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그 믿음대로 자신의 생활과 행동에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거듭났다 하면서도 어떤 행동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믿음은 가식적인 것이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말씀을 들을 때 자기의 죄가 깨닫기만 하고 정작 행동으로는 옳겨 고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오래 믿어도 변화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거울을 볼 때 얼굴에 무엇이 묻었으면 즉시 닦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찔림을 받을 때 자기의 결점을 발견하여 고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이런 것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것이며, 여기에 다른 어떤 외부적 요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야고보는 본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또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4절), 그리고 26절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하고 행함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서, 행함이 있어야만 참된 믿음이라 말하고 있다. 야고보의 이 주장은 바울이 말하는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이신칭의” 교리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신득구” 교리와 괴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져, 우리 믿음에 약간의 혼돈과 혼란을 초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루터는 신학적인 면에서 야고보서의 이 구절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사상과 배치된다고 보고 야고보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칼뱅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야고보서는 어떤 방식으로 의롭게 되는가를 논의하지 않고, 신자들에게 선행으로 맺는 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야고보가 칭의 결과로서의 행함을 강조한 반면, 바울은 칭의의 원인으로서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야고보는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얻은 성도는 그 구원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당시의 모든 성도들은 믿음으로 모든 구원이 다 해결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너무 믿음만 강조한 나머지 그들은 말씀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경건치 못한 부자들의 횡포와 학대 때문에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했고(5:1-6), 일부 성도들의 신앙은 형식에 치우쳤으며(1:22-27; 2:14-26), 사랑이 식어져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2:1-13). 또한 말과 행동이 거칠어서(3:1-12; 3:13-4:3). 성도간의 교제가 단절되어 갔다. 이 때문에 야고보는 이들을 격려하고, 잘못된 신앙 자세를 시정하며, 또한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른 인식을 교훈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다.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주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것을 행할 의무가 주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 얻은 것을 빌미로 주님의 가르침을 행하지 않는다.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기 때문에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으름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참으로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고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여러 예증처럼 그 행위가 반드시 뒤따라야 하며, 그런 행위가 수반될 때 그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이라 하였다. 야고보는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조건으로 행함이 수반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간음하고, 도둑질하며, 거짓말을 계속해서 한다고 하면, 그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한다고 하면, 과연 그를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그 사람이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요 16:13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성경 진리에 어긋나도록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가 말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은, 거짓일 것이고, 그의 믿음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그 믿음의 결과에 따른 행함이 반드시 뒤따르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가 분명한 것이다. 행함이 구원의 직접적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믿는 자의 결과로서 그 행함이 있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313년 밀라노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대제는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열심에도 불구하고 337년 죽기 바로 직전까지 세례를 받아 교회에 속하는 일을 미루었다. 그는 괜히 일찍 세례를 받아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그 뒤부터 육신이 누리고 싶은 것들에 제약을 받는 부담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임종을 앞두고서야 당시 니코미디아 감독이었던 유세비우스를 불러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려주시면 집회에 나가겠다고 고백하고, 다시는 자주색 황제복을 입지 않고 개종자가 입는 옷을 입겠다고 약속했으나, AD 337년 세례받은 직후에 죽고 말았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말씀대로 구원을 이룬 것만큼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불 가운데서 영혼만 간신히 구원받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다. 결국,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었다.

 

행함은 신앙의 열매로 나타나는 행위를 가리키며, 인간의 도덕적 선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행함으로 구원이 온전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현대어성경은 15-16절을 “여러분의 친구 한사람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에게 여러분이 `참 안됐구려.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는 말만 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따위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번역하였다. 자기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것을 보았다면, 당장 그에게 먹을 것과 몸을 가릴 것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는 것은 곤고한 형제, 자매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만 더욱 가중시키는 불신앙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는 거짓으로 선을 베푸는 외식가이며,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그 믿음의 분량에 합당한 실천적 행위가 수반될 때에 온전해지고, 산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믿는 자가 더 이상 간음이나 도둑질 같은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죄악을 벗어 버리고 주님을 닮아 거룩해져야 할 의무와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즉, 행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 성도는 주님처럼 진실해야 하며, 특별히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일 3‘18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하였다. '말과 혀'는 실천이 없는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은 실천하는 사랑을 나타낸다. 여기서 '행함'은 사랑의 외부적, 실천적인 면을, '진실함'은 사랑의 내부적, 질적 측면을 나타낸다. 성도가 세상의 소금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떤 것으로도 다시 짜게 할 수 없고 밖에 버려진다. 성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살면, 복음의 빛이 가려지고,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고, 자신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된다. 국민일보가 교계 지도자 100명을 대상으로 '한국 교회 성장 둔화의 1차적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란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35%가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꼽았다. 신앙인은 무엇보다 언행일치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된다.

 

독일 뤼벡교회의 낡은 돌판에는 작자 미상의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르지 않고, 길이라 부르면서 걷지 않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슬기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부자라 부르면서도 구하지 않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어질다 하면서도 오지 않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굉장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나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죽은 믿음은 행함이 없다.

 

 

二.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가톨릭의 성인으로 불리는 투르의 마르탱은, 그가 군인 신분이던 어느 추운 겨울날, 벌거벗은채 추위에 떨면서 성문에서 구걸하는 한 거지를 만났다. 마르탱은 자기가 걸치고 있던 망토를 두 쪽으로 잘라서 그 하나를 거지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속에 거지에게 주었던 망토를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 “네가 이 옷으로 나를 입혀 주었다”라고 말씀하는 체험했다. 그는 제대하여 사제 서품을 받아 주교가 되었으며, 가톨릭교회에서 순교자가 아니면서도 최초로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아 전도사로 만들었다. 6.25 동란 중에 모든 이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할 때에도, 그는 주께서 피로 값 주고 세우신 성전을 지키기 위해 모든 성도들을 대피시킨 후에 자신은 공산당의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러므로 후대에 사람들은 그는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렀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야말로 살아있는 믿음이고 역사하는 믿음이며,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온전한 믿음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산 믿음을 가지라 명령하신다. 모태 신앙, 많은 직분, 오래 믿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연조나 직분의 여하와 관계없이 행함을 가진 믿음이다. 신앙의 선진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이 면에서 좋은 본보기이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꼭 실행해야 되는 말씀으로 믿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였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고 하신 언약의 말씀과, 이삭을 변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다 같이 믿고 순종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다 해도, 하나님이 만능으로 그를 다시 살려서 약속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었다(히 11:19).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은 분명히 믿었지만, 이삭을 바치지는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죽은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생명 있는 산 믿음에 대하여 받은 것이다. 그의 산 믿음은 외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증빙이 되었고, 외아들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산 믿음이 있었던 증거이며, 그러한 산 믿음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만 난다(롬 10:17).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절반이고, 몸으로 행하여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나머지 절반이다. 이 둘이 합쳐질 때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 된다. 말씀을 마음에 받아 믿고, 몸으로 순종할 때에 역사하는 행함이 나오게 된다. 모세가 "홍해를 갈라지게 하여주소서 꼭 갈라질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여 홍해가 갈라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키라 하신 말씀이 있었고(출 14:15-16), 모세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들어 홍해가 가리킨 후에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모세가 아무리 지팡이를 내밀어도 홍해는 결코 갈라지지 않는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몸으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홍해의 기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히 11: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을 마치고 요단을 건너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하루 한 바퀴씩 엿새 동안 돌고, 제 칠일에는 일곱 바퀴를 돌 것을 명하셨다. 그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을 믿고 순종하여 그대로 행하였였으므로, 여리고 성을 무너졌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면을 보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여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셨다. 하루 한 바퀴씩 돈 것은 매일 그날그날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마지막 날에 일곱 바퀴 돈 것은 완전 순종을 가리킨다. 이것이 산 믿음이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은, ➊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인 것을 믿었고, ➋하나님은 천상천하 모든 것을 홀로 주관하시는 대 주재이심을 믿었고, ➌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하셔서 영접하는 자도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었다. 그 믿음으로 라합이 자기 본향이요, 본토인 여리고 성과 그의 육신의 동족과 친척을 버리고, 이스라엘 정탐군들을 영접하여 보호해 주고 평안히 돌려보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믿고,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참여하여 합력하였음으로, 하나님을 순종치 않는 자들이 멸망할 때에 구원을 받았다.

 

믿음의 행함이 있으려면 신앙의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 우유부단하면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하고 여호수아서 1:6-9절 사이에 거듭 거듭 말씀하셨다.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은 모두 이런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믿음을 실천에 옮기려면 값비싼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이처럼 물질을 희생하며 헌신하는 사람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시고, 여호와이레의 축복과 상급을 받게 하신다.

 

롬 2:13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 하였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은 말씀을 듣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일 뿐 아니라, 듣고 깨달은 말씀을 행할 때에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셨다.(마 5:48). 우리가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려면, 깨달은 말씀대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 배우고 깨달은 대로 실천하는 성도의 믿음은 점점 온전케 된다. 햄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결론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2.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shamerin 2021.02.21 272
7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라 shamerin 2021.02.14 139
6 시험을 참는 자의 복 shamerin 2021.02.07 189
5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shamerin 2021.01.31 203
4 네가 낫고자 하느냐 shamerin 2021.01.24 125
3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shamerin 2021.01.19 181
2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라 shamerin 2021.01.19 119
» 온전한 믿음을 가지라 shamerin 2021.01.19 170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Nex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