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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민 11:18-34

제목 :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一.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라.

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느니라” 하였다. 하나님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우리에게 가장 복되고 유익하고 좋은 것만을 주신다. 19:3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하였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면 조금만 어려운 일, 힘든 일, 고난을 만나면 원망, 불평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는 어떤 형편이나 환경에서도 결코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성도가 원망,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며, 원망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한다.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하는 것은 믿음에서 떠나 육신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원망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며, 원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우리의 심판주는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밖에 서 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원망하지 말라는 것은, 원망할만한 일이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 구속의 은혜와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이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거역하며, 원망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9: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22:21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와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지만, 홍해 앞에서, 자신들을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를 바라보면서,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하고 원망하였다(출 14:11).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로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너 광야로 사흘 길을 들어갔으나, 물을 얻지 못하자 이스라엘은,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하고 원망하였다(출 15:24).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서 양식이 부족해졌을 때,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하고 원망하였다(출 16:3).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을 얻지 못하자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하고(출 17:3) 일을 당할때마다 하나님과 인도자 모세를 원망하였다.

본문 1-3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베라’에서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진 끝을 살라 원망하던 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진 끝’은 행군 대열에서 이탈하여 뒤에 처졌던 무리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힘써 나가려 하지 않고 뒤쳐져서 힘들다고 원망과 불평, 악한 말로 불평하던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원망하는 패역한 자들을 불사름으로써,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치 않고 원망을 일삼는 자들에게 어떤 징벌을 내리시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같은 징계를 기억하지 못하고, 또 다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고기를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였다(5-6절).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용 양식이었던 만나는 그들이 일한 수고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 것이었다. 만나는 얻기 위해서 애굽에서처럼 노동을 할 필요 없이 그저 그날에 필요한 양만큼 거두어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만나는 모든 영양소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어서 그것만 먹어도 영양 부족도 생기지 않는 신비한 양식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는 커녕 만나 외에 다른 양식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였다. 6절에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하며, 하나님이 거저 주신 만나에 감사하며 만족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다른 것을 더 달라.”고 하였다.

 

과거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에 그들이 값없이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 살이 때에 합당한 품삯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값없이 먹은 것이 생각난다고 했지만, 애굽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거저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나일강 물에 던지고 대신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 대가로 준 것을 얻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노예로 부리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통을 주던 애굽인들이 자신들에게 거저 그런 좋은 음식들을 준 것으로 착각하였다. 반면에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며, 만나밖에 주지 못하는 하나님을 무능하다고 원망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의 욕심은 무저갱과 같아서 세상 어떤 것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다. 30:15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한다고 하였다. 거머리는 주둥이와 뱃바닥 끝에 있는 흡혈판을 사용하여, 다른 동물의 피를 빨아먹으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더 달라면서 욕심을 채우려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치 못하고 끝없이 ‘다오 다오’하고 욕심으로 행하며 원망하는 사람은 마치 이 거머리와도 같다.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조지 번스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후, 그렇게 모든 것이 풍족한 상태에서 만드신 아담과 하와에게 왜 옷을 지어주시지 않았을까“라고 묻고, 그 이유는 ”그들에게 옷을 주면 주머니를 달아 달라고 할 것이고, 주머니를 만들어주면 거기에 돈을 가득 채워달라고 징징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서 있을 때는 앉아만 보았으면 하다가, 앉게 되면 누웠으면 하고, 누우면 자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다.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이신 목적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려 함이었다. 즉 당장 눈앞에 보이는 먹을 떡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초자연적인 역사로 먹을 것을 주신다는 알게 하려 함이었다.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므로, 사람의 생명이 떡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고, 사람의 영은 떡이 아닌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을 때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날마다 초자연적인 역사를 자신들에게 베풀어 살아가게 하는 은혜에 감사하며, 일용할 육신의 양식을 매일같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여야 한다.

 

옛적에 청교도들은 믿음을 찾아 떠난 새로운 땅에서 고난을 겪을 때 서로 만나면 “The best is yet to come.”(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인사했다고 한다. 1620년 12월 11일 몹시도 추운 겨울에 미동북부 해안 풀리머스에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하나님께 일곱 가지 감사를 하였다. 첫째, 180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이지만 그 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둘째, 걷는 속도보다도 느린 평균 시속 3km 정도의 항해였으나 65일간 계속 전진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셋째,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에 감사했다. 넷째, 폭풍으로 배의 큰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다섯째, 여자들 몇이 파도 속에 휩쓸려갔으나 모두 구출되었음에 감사했다. 여섯째,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지를 찾지 못해 바다에서 표류했지만 호의적인 원주민의 도움으로 육지에 상륙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일곱째, 고통스러운 항해 중 단 한 명도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었음에 감사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길에서 어떤 것을 주실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 청교도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복되고 유익하고 좋은 것만을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또 그렇게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 당장의 형편이 조금 어렵고 힘들고 고난이 있다고 해도 원망이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이 소망을 가지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좋을 때만 감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니다. 건강하고 성공하고 일이 잘 될 때 하는 감사는 누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과 실패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것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다. 특별한 믿음, 성숙한 신자가 아니면 역경의 상황에서 감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청교도들은 극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잃지 않았다. ‘작은 배지만’, ‘느린 항해였지만’, ‘죽었지만’, ‘부러졌지만’, ‘휩쓸렸지만’, ‘표류했지만’, ‘고통스러웠지만“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들의 감사를 생각할 때 그들보다 훨씬 안락하게 사는 우리들은 불평할 것이 없다. 비록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실패했다 하더라도, 감사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것 ”살아있다는 것“이다. 죽은 자는 고난과 시련을 겪지 않는다. 살아있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도 감사의 이유는 충분하다. 고전 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우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는 자가 되지 말고 감사하는 자가 되자.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二. 탐욕을 버리고 지족하라

애굽에 들어간 야곱의 족속이 75명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번성하여 출애굽할 때에 장정만 60만 명이었던 것에 비하여, 광야 40년 동안에 그다지 번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광야에서 쓰러져 죽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지 못하는 자가 하나님을 원망한다.

 

탐욕은, 절실히 필요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분수에 넘치는 것을 무리하게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다(창 3:6). 그들에게는 현재 맛있는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가나안 정복, 하나님 뜻의 성취)이 산적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욕심을 따라 원망을 일삼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문제로 지금 광야의 생활이 애굽에 있을 때보다 못하고, 그들이 오히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동경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4절에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하였다. “섞여 사는 무리”는 출애굽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나온 이방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들은 당연히 민족적 자긍심이나 조상 전래의 여호와 신앙 및 가나안을 향한 소망이 없었고, 따라서 광야 생활 중에 만나는 어려운 고비 때마다 제일 먼저 불평, 불만을 터뜨렸다. 문제는 이들 믿음 없는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도 울며 원망하는 일에 동참하였다는 것이다. 18-20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그들이 원하는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되,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20일만 먹게 할 뿐 아니라, 코에서 냄새가 나서 싫어하기까지 1개월간을 먹게 하실 것이라 하셨다.

 

유아 외에 보행자 60만이 1개월간 고기를 먹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도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모세도 21-22절에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반신반의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23절) 말씀하시고, 말씀대로 역사하심을 곧 보게 될 것이라 하셨다.

 

벳새다 들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실 때 빌립이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지만, 예수님은 5천 명이 배 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도록 역사하셨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신앙은 하나님의 만능을 믿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생명을 유지하게 하신 하나님은, 그 무한한 능력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허락한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거두는 수고만 했을 뿐이면서도, 거저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것을 욕심내며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은혜를 기억지 못하고, 욕심에 사로잡혀 끝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딤전 6:6-10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지족(知足)은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자족하는 생활이다. 과거와 현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 모든 형편이 내게 가장 좋은 것, 알맞은 것으로 주신 것으로 믿는 것이다.

 

인생은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간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당장 걸칠 수 있는 의복 한 벌만 있어도 감사하며, 이슬을 가리고 누울 잠자리만 있어도 감사한 것이다. 부하려 하는 욕망을 가지고 나가면, 본의 아니게 욕심으로 행하고 결국 그릇된 길을 걷게 된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죽은 후에만 썩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남아있는 동안에도 절망과 욕심 때문에 썩어간다”고 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고 불평하며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고기를 주셨다. 강한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 사방 하룻길, 즉 지면 약 40km 반경에 걸쳐서, 두 규빗, 즉 90cm 정도의 두께로 내려 쌓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나 이틀에 걸쳐 메추라기를 모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고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거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원망을 들은 후에야 뒤늦게 주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마땅히 받을 것을 받은 것으로 여겼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애굽이나 애굽 왕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알았어야 했다.

 

탐욕으로 행한 사람들이 먹은 고기가 아직 이사이에 남아 있을 그때에 하나님이 큰 재앙으로 그들을 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고 이어 그들을 죽이신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고기를 탐하여 원망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고기를 주실 때에 감사하지 못하고 욕심으로 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신 만나에 감사치 못하고, 욕심으로 자기 정욕을 위해 고기를 구했던 자들은 그토록 원하던 고기를 이로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고, 욕심으로 행하던 백성들을 장사한 그곳은 기브롯 핫다아와라 즉 ’욕심의 무덤‘이라 불리게 되었다. 기브롯 핫다아와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원망하며 탐욕의 노예가 되었다가 죽은 백성들을 거울삼아, 후대에 다시는 원망과 탐욕으로 나가지 말라고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탐심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이상을 원하는 마음이다. 욕심을 마음에 품으면 영의 눈이 가려져서 마음이 어두워지고, 그 욕심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죄를 짓고, 죄 값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욕심으로 시날 산의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감추었다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들과 함께 아골 골짜기에서 불살음을 당하였다. 선지자 발람도 재물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 백성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죄값으로 여호수아의 칼날에 죽임을 당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인본주의로 행하다가 왕위를 빼앗기고 세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사사 삼손도 큰 능력과 사사의 직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직무를 잊고 들릴라에게 빠져 연애하다가 블레셋에게 멸망 당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물질을 사랑하다가 문둥병이 들렸고,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하여 예수를 팔았다 목메어 자살하였다.

 

욕심으로 부를 쫒아가고 탐심과 탐욕으로 감사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탐하거나 빼앗거나 불의로 재산을 모으면 그곳이 바로 기브롯 핫다아와 즉, 탐욕의 무덤이 된다. 우리는 장래 일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어떤 좋은 것을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았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찬송가 #373장 “고요한 바다로” 2절에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지금 형편이 조금 어려워도 힘들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이 되었든지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 줄 믿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며, 탐욕을 버리고 지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탐욕을 버리고 지족하자.

 

 

 

 

 

결론

1. 원망하지 말고 감사하라.

2. 탐욕을 버리고 지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