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by shamerin posted Mar 1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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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눅 9:23-26

제목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란, 사전적 의미로 “존재의 본질 또는 이를 규명하는 성질”인데, 한 마디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미운 오리새끼는 나중에 자기가 백조인 사실을 깨닫고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백조이면서도 오리처럼 살다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대에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 기독 신자의 정체성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신분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면,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一. 자기를 부인하여야 한다 (내적인 면)

현대어 성경은 23절을 “그러고 나서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욕망과 편안한 것들을 다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였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과 욕심 그리고 육신을 편안하게 하는 것들을 다 버리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일분일초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안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자기 위하는 생각과 자기의 뜻을 거절하고 인정치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출발점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4: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흙처럼 연약하여 부숴지기 쉬운 존재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하루살이는 약한 충격에도 쉽게 죽고 길어봐야 일주일을 살뿐이다. 인간은 이처럼 하루살이같이 미약한 존재이다. 4: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다. 우리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아침 안개와 같아서 언제 하나님이 데려가실지 알 수 없다. 인간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한다(시 146:4).

 

인간은 심히 연약한 존재이다. 쥐는 태어난 지 3일이면 귀가 열리고, 2주 후에는 눈을 떠 사물을 보고, 3주 후에는 젖을 떼고 이유식을 먹으며, 4주가 지나면 어미 곁을 떠나 독립할 수 있다. 그리고 8주에서 12주가 지나면 성적으로 성숙하여 교미가 가능하며, 암쥐는 한 번에 6~12마리의 새끼를 일년에 4차례 낳는다. 쥐는 1미터 정도의 담을 뛰어넘을 수 있고, 평지에서 1.2미터까지 뛸 수 있으며, 5층 정도의 건물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고, 90도 경사의 수직벽도 올라갈 수 있다. 물독에 가둬 놓아도 3일은 버텨내며, 쉬지 않고 1킬로미터를 수영할 수 있는 운동능력이 있다. 500원짜리 동전 크기의 구멍이면 끼지 않고 통과할 수 있으며, 200볼트의 전기 쇼크를 60초 동안 견디고, 영하 40도에서 영상 60도까지면 어디서든 번식할 수 있다. 송아지는 엄마 뱃속에서 나오면, 불과 몇 분 만에 일어서서 걸어 다니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돐이 지나야 겨우 걸음마를 할 수 있다. 사람과 소의 임신기간이 비슷하지만, 일어서고 걷는 것은 소가 인간보다 얼등히 빠르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울이 바울이 되어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기 때문에 된 것이며, 그가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며 주의 일을 한 것도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 것이나 자기가 이룬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뿐이다. 재물 얻을 능도 하나님이 주신다. 8:17-18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사람이 재물을 얻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을 주셨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일이 맞아 떨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거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연적 예정과 섭리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은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하며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임을 알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4:3-5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아담이 비록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으나 장차 그리스도가 오셔서 피 흘려 희생하여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인과 아벨에게도 그 말씀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래서 아벨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와께 제사르 드렸으나, 가인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여 자기 생각과 고집대로 농작물로 제물을 삼아 드렸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가인처럼 인본주의의 삶 즉,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의 생각과 주장, 수단, 방법을 따르게 된다. 구원받은 기독교인은 자기를 부인하고 아벨처럼 모든 일,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본주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생각과 수단, 방법 즉, 인본주의적 발상을 버리고 만사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의 인도와 주장을 받는 성령이 충만한 신본주의 사람으로 변화하라는 것이다. 매사를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아 나가며, 범사를 신앙양심에 비추어 가책을 받지 않는 것만을 행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신본주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본문과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 16장에서, 예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였을 때,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고 책망하셨다.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 개인을 위해 한 말인데, 왜 자신을 위해 간구하는 베드로를 오히려 사단이라고 하셨을까? 그 이유는, 베드로가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였기 떄문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셨다. 성도는 먼저 하나님을 위하며 하나님의 일이 잘되는 길을 찾아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여 자기가 잘되고 평안한 길을 찾아가는 자는 사단의 인도를 따라가는 자가 된다.

 

부자 청년은 그가 원했던 영생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해답을 얻었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여 영원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고 말았다. 사울 왕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여 주님으로 버림을 받았으며, 고라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여 땅의 삼키움을 받았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여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죄를 짓고 하나님을 시험하며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우리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그들과 같은 삶을 살다가 같은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중심의 인본주의 사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로 사는 것이며, 구원받은 성도가 더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외적인 면)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성도는 죄악 세상에서 택함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사죄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이제는 성도를 지배하는 법과 나라가 전혀 다르며, 불신자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사모하며 자기들과 다른 사상을 가지고 구별된 생활을 하는 성도를 미워하고 핍박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삶을 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주님이 각 사람에게 날마다 메어주사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십자가의 멍에는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으로 메워주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각인에게 주신 순종, 사명, 직책을 의미한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였다.

 

롬 8:17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라“하였고, 빌 1:29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구세주 예수를 위한 고난도 받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에게는 형통한 비단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한 고난의 길이 또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에게도 환난이 필요한 것은, 천국 시민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환난은 잘 믿는 자와, 잘 믿어 보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현대에는 기독교인들이 고난 없이 예수를 믿고, 고난보다 영광을 취하려 하는데, 이것은 농부가 농사짓는 수고 없이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것과 같다. 6:6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하였는데, 요셉의 환난은 믿음 지키다가 당하는 환난이다. 요셉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다가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갔고 또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죄짓지 않으려고 하다가 애매히 감옥에 가서 환난을 당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이므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반드시 핍박이 온다(딤후3:12)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낮아져 섬기는 자에게 예비하신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누구에게나 자기 십자가가 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성도는 날마다 예수님이 메어주신 자기 십자가를 잘 지고 가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회피하면서 영혼과 범사가 잘 될 수는 결코 없다. 복 받기를 원하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새의 날개가 무겁지만 잘라버리면 날지 못하고, 베의 돛도 무겁지만 잘라버리면 항해를 할 수 없고, 시계추도 무겁다고 떼버리면 시계가 돌아가지 않듯이, 성도가 십자가가 무겁다고 던져버리면 그 즉시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문도 닫히게 될 것이다.

 

28:12-13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렸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대신 쇠 멍에를 메게 하셨다. 쇠 멍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에게 강제로 메게 하는 무거운 징벌의 고난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벨론의 멍에를 메라고 한 것은, 그들이 과거에 성전과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며 교만하던 것을 회개시켜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영이 사는 참된 길을 걸어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들의 조서를 좇아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그 시대에 하나님이 메어주신 십자가였다. 그러나 그들은 14년 동안 자기 집짓는 데만 빨랐으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이슬을 그치게 하고 땅은 산물을 그치게 하고 한재를 불러 그 땅과 그 위의 모든 것에 임하게 하고 모든 수고가 헛되게 하셨다.

 

풀무불 위협에도 금신상에 절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잘 지고 간 세 친구에게 느부갓네살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다.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육신의 목숨을 중히 여겨 그 목숨을 위해 주님 따라가기를 중지하면 영적 생명의 역사를 잃게 된다. 영적 생명의 역사를 소유하려면 자기 육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어떠한 환난이 와도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을 위하여 육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말씀을 지키면 고난당하고 순교하기도 하지만 영적 생명은 새롭게 살아가며 새 생명의 역사가 더욱더 커 나가는 이것이 참으로 산 것이다. 육신의 생명은 잠깐이요 영의 생명은 영원하다. 천하를 다 얻고도 영적 구원을 이루어 나가지 못하고, 영의 생명이 살아나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천하를 얻었어도 잠시 후에 육신의 목숨이 없어질 때 그것들이 모두 남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20:22-24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금번에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거기서 환난과 결박을 당할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고, 신앙양심을 쓰는 것임을 알았기에 환난을 각오하고 올라갔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메어주신 십자가인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명도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이 누구를 좇는 삶을 사는냐에 따라 그 사람의 장래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좇아 마귀의 종살이 하다 결국 사망을 거두게 되지만, 영을 좇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아 의를 행하여 생명과 평안을 얻는다. 주님에게 붙잡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성도는 생명과 평안을 얻고 선한 싸움을 싸워 상급을 받게 된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날마다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결론

1. 자기를 부인하여야 한다.

2.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