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

by shamerin posted Feb 1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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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라

본문 : 롬 12:1-2

 

야곱의 가족 75명이 가나안의 기근을 피해 요셉이 총리로 있던 애굽으로 내려가 이방인으로 살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이 매일 하는 일은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로 바로를 위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는 일과, 농사를 위한 수로 개간과 농토 개간 등 중노동이었다. 요셉을 모르는 왕은 히브인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 남자아이를 낳으면 모두 하수에 빠뜨리도록 하는 법령을 발표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하였다(출 2:23).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430년이 마치는 날에 인도자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로 인도하여 40년간 생활하게 하셨다.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대로 만들어졌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도착한 때가 3월이며(출 19:1), 성막은 그 이듬해 1월 1일에 봉헌되었다.(출 40:2)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시고 성막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 주시는 성별 된 장소로, 이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한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성막은 ‘회막’(會幕, 오헬 모에드) 곧 ‘만남의 장막’ 혹은 ‘만남의 집’이라고 불리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시는 처소라는 뜻이다. 출 29:42-43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고 말씀하셨다. 회막 안 지성소 안의 속죄소는 특히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장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속죄소에서 너와 만나겠고 거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말하겠다”고 약속하셨다(출 25:22). 성막은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중심이었다.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3개씩 지파를 나누어 진을 치며 살았으며, 진들의 문은 반드시 성막을 향하도록 했다. 성막을 진 중앙에 두도록 한 것은, 예배드리는 일이 모든 일에 우선되는 일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성막을 등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있을 때 바로와 그들의 신을 섬기며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들에게 부과된 노역을 해야만 하루, 하루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육신의 생명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 나온 그들은 이제 의식주를 위한 어떤 노동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 영혼과 육신의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율법을 지키며, 성막을 중심으로 한 예배 생활을 하도록 하셨다. 성막은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출 20:24절에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하신 말씀을 공동번역은 “너희는 흙으로 나의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다 번제물과 화목 제물로 너희의 양과 소를 바쳐라. 내가 내 이름을 부르게 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내가 너희를 찾아가서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안식일을 포함하여 마땅히 지킬 것 지켜야 할 대원칙을 알려주시고, 성막 중심의 삶을 살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마귀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광야에서 자유의 삶을 살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드리는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임하여 복을 주신다고 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하여 복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예배를 귀중히 여기고, 예배를 생활화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외 없이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선한 일에 열심을 내며,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여 여러 면에 복을 받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실패는 예배의 실패 결과라 할 수 있다. 예배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신앙생활에 실패할 뿐 아니라, 육신의 삶도 불행해진다.

예배는 하나님을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며 그 만드신 모든 만물과 우리 인간사를 통치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며 감사하는 행위이다. 만약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하면서도 예배드리는 일에 소홀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이며 예배의 개혁이었다. 칼뱅은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고 여러 모양으로 난자당하고 있는데, 만일 우리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라 믿었다. 개도 다른 사람이 자기 주인에게 함부로 하면 짖어대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그토록 모독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다는 것은 개만도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며, 예배할 때에 임재하셔서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래서 예배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한다.

 

삼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최고 위치에 모시고 최고의 예우를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존중히 여기신다. 아브라함은 거처를 옮길 때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올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여 믿음으로 일천번제를 드려, 천하에 제일가는 지혜와 부귀를 누린 왕이 되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우리 삶의 최고의 자리로 모신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이 땅에서 최고의 자리로 높여주실 것이다. 예배는 성도가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로 모시고 예우하는 것이다.

 

대하 29:6-9 우리 열조가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얼굴을 돌이켜 여호와의 성소를 등지고, 또 낭실 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한고로,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진노하시고 내어버리사 두려움과 놀람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신 것을 너희가 목도하는 바라, 이로 인하여 우리의 열조가 칼에 엎드러지며 우리의 자녀와 아내가 사로잡혔느니라.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성전에 우상과 가증한 것들을 세워 놓고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이 버린 바 되어 원수들에게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고, 백성들은 대적들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자녀와 아내가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환난을 당하였다. 아람 나라가 침공하여 심히 많은 유다 사람들을 포로로 잡혀 다메섹으로 끌려갔다. 또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가 쳐들어와 왕의 아들과 왕의 심복들을 포함하여 유다인 12만 명을 죽였으며, 20만 명의 유다인을 포로로 잡고 온갖 재물을 노략해 갔다. 그럼에도 아하스가 회개치 않고 더욱 범죄 하여 망령되이 나갔으므로, 하나님께서 에돔 사람과 블레셋 사람을 보내어 그들이 유다 평지와 남방 성읍들을 빼앗고 거기 거하도록 하였다.

 

히스기야는 이 모든 일이 예배를 경홀히 여긴 결과인 것을 알았다, 유다 나라가 현재 당하는 고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돌아가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뿐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르자마자 예배의 회복을 위해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먼저 성전 문을 열고 온갖 더러운 것들을 성전에서 내다 버려 성전을 깨끗이 하고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흐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여, 앗수르의 대군을 하나님이 대신 물리쳐 주셨으며, 히스기야가 열국의 눈에 존대하게 하셨음며(대하 32:23), 죽을 병에서도 고침 받아 15년을 더 살았다. 예배는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의 출발점인 동시에 복 받는 통로이다.

 

하나님은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예배를 통해 상한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시며, 지친 영혼에게 새 힘을 주신다. 예배의 기능 중 하나인 이런 회복은, 성도들이 오직 예배를 통해서만이 누릴 수 있는 큰 복이며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피곤하다고 화장한 얼굴 지우지 않고, 몸도 씻지 않고 그냥 잔다면 나중에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 예배는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을 회복시키고 새 힘을 충전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예배를 위해 일신상의 여러 손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기쁨으로 예배에 참여하던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아름다운 전통은 점차 사라지고, 그저 자기 유익과 편리를 위한 선택적인 예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코로나로 인하여 모이기 쉽지 않은 때를 당하였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예배이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롬 12:1-3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참된 예배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에게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이 타락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어야 한다.

 

 

一.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리는 제사

예배는 ‘경배’라는 뜻이며,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경배한다, 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은혜와 진리를 받고 신앙이 성장하기 위함이다.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는 생명적인 제사이며, 영이 새롭게 살아나고 자라나는 제사이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예배를 드려야 참 예배가 된다. 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만, 죽은 제사는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지도 않으신다.

 

4:3-5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아담의 장남 가인은 자기가 농사한 농작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제사드렸고, 차남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여호와께 제사드렸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벨은 말씀에 합당한 희생의 제물을 드렸음으로 열납하셨으나, 가인은 그리스도 구속을 상징하는 희생의 제물 대신 자신이 가진 곡식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구속의 은혜를 바로 깨닫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시고 열납하신다.

 

4:23-24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약시대에는 구약의 장소적인 예배나 의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가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성도의 중생한 영이 성령을 힘입어 신령한 세계에서 그리스도와 교통하며 성경 말씀대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이러한 예배가 영적 예배요, 성도의 영이 사는 예배이다. 신약시대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예배이며, 이런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열납하신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한 사람이 많다. 올바른 제사, 복 받는 제사를 드리려면, 말씀대로 해야 한다.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바른 진리의 지식을 갖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심을 내어도 사울과같은 제사를 드려 도리어 하나님 앞에 악한 자로 나타나게 된다.

 

삼상 13:11-12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한 것은 좋은 것이지만, 베냐민 지파인 사울이 제사장 노릇을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다. 사울은 왕이 된 지 불과 이 년 만에 교만해져서,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였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얻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목적이 좋다고 해서 방법을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된다. 목적과 방법이 다 같이 바르게 말씀대로 해야 한다. 제사드린 것 때문에 사울에게서 왕권을 빼앗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고도 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부당한 제사를 드린 것은 제사를 멸시한 죄가 된다. 참된 제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한다. 사울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임의로 제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영광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후대에 웃시야 왕도 말씀을 어기거 자기가 분향하려다가 문둥병이 들려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

 

오늘날 성도들도 다만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족하게 여기지 말고, 말씀에 맞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제사를 존중히 여겨 성경에 맞도록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도 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는 아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리는 제사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지만,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신다. 66: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가난한 마음이 없고, 심령에 통회함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 떨지도 않으면서, 의식적으로 소나 양을 잡아 하나님께 드리며 분향하는 것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이사앵 당시 사람들이 양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했지만 하나님이 받지않으신 것은, 그들이 양의 피가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영적으로 믿지 않고, 의식적이고 형식적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제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제사이다.

 

 

二. 우리의 온몸을 드리는 제사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할 때, '몸'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중생한 영에게 이용된 마음과 합해진 온 몸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 성령의 전이 된 그 몸까지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 전체를 우리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로 드리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하셨다.(마 22:37-38).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외부적으로 나타내는 것의 가장 상징적인 것이 바로 예배이다.

 

만일 예물로 드려지는 소나 양이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로 있다면, 번제단 위에서 날뛰어 거룩한 성소와 지성소를 망쳐버리게 될 것이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고, 성전에 바쳐진 제물과 같이 온전히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이다. 이방인처럼 실제로 사람의 육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뿐만이 아니라, 그 온몸까지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원래 '분리하다'는 뜻으로 '거룩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번잡한 세상과 분리하여, 죄악으로 오염된 공간과 분리되어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다. 따라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은, "온 정성을 다해 흠이 없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다. 세상 불신자들도 세상 대통령이나 회장과 약속이 있다면, 혹 약속 시간에 늦을까 노심초사하며 일찍 준비하고, 행여나 무례하게 보일까 하여 복장이나 언행도 극도로 조심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물며 구원받은 성도가 예배시간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늦거나 빠지거나 예배 중 개인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예배를 경홀히 여기는 것이다.

 

누구든지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 시간에 늦지 않고 빠지지 않고 정성을 다해 예배하는 사람은 소망이 있으나, 반대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세상 것인 공부, 직장, 돈, 명예를 크게 여겨 주일을 범하고 예배 시간에 늦고 빠지며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할 것이다. 모든 봉사의 중심은 예배이다. 예배에 드려지는 예물이 흠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도 예배드리는 일에 흠이 없어야 한다.

 

칼뱅은 설교자를 “하나님의 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회중드이 듣는 것과 같다. 봉사는 참으로 귀한 것이나, 봉사의 가장 좋은 편은 예배이며, 예배의 가장 좋은 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옳은 것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하고, 그 시간과 그 자리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10장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교훈도 예배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마르다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대접하는 봉사의 일을 더 귀중히 여겨 예배를 소흘히 하면, 그는 칭찬보다 책망을 받을 것이다.

 

사 55:3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자기 영이 살고, 깨달은 말씀으로 자기를 변화시키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말씀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편은 없다.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하나님의 말씀은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말씀 받는 것과 기도 시간을 빼앗기면, 다른 것을 아무리 많이 얻었다 할지라도 실상은 자기 생명과 모든 것을 다 잃은 것과 같다. 주님을 대접하고 봉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말씀 들을 시간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씀을 듣고 자기 영혼이 사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 무엇보다도 예배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 중 한 명인 A. W. 토저(Tozer) 목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로 만드신다”고 말했다. 자유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차 조차도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예배의 성공이 참된 인생의 성공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예배보다 급한 일이 없고, 예배보다 중요한 일도 없다.

현대어성경은 2절을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딴 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법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인가를 여러분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우리는 타락한 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예배드리는 일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배의 의미를 바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령과 진정으로 자신의 온몸을 산 제물로 드려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희가 되어야 한다.

 

 

 

 

결론

1.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리는 제사

2. 우리의 온몸을 드리는 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