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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1 08:57

예수님 앞의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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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막 14:1-11

제목 : 예수님 앞의 두 사람

 

一.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한 마리아 (1-9)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그의 여동생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 부어드렸다. 유대의 전통적 관습은 식사 도중에 가장 귀한 예빈에게 향유를 부어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향유를 부어 드렸다. 잠시 후에 예수께서 구속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되실 것을 알고,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었다. 당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부패되기 전에 미리 향유를 발라 악취를 막았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의식이었다. 오직 마리아만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고, 예수님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마리아는 주님을 위한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주님을 위해서는 향유의 값이 얼마인지, 나중에 향유를 팔아 어디에 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리는 것을 결코 낭비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을 위해 대신 속죄의 죽음을 죽어 주신 의미와 가치를 안다면, 나드 향유가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부족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자주 말씀하신 목적은, 십자가의 구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제자들에게 장차 십자가의 고난이 올 것을 대비하여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염려만 하고 준비하지는 않았다. 마리아는 주님의 제자도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그런 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런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합당한가에 대해 기도하였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실 예수께는 돈이나 음식이나 옷같은 것보다, 주님의 장사를 위한 향유가 가장 필요함을 깨닫고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것이다.

 

마리아는 지금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보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이 합당한 것으로 믿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구제하는 것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마리아가 주님의 제자들보다도 더 많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 했는지도 모른다. 그 증거는 전에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위로했던 것을 보면, 마리아가 평소에 여러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덕을 세웠던 것이 분명하다. 만사가 때가 있고 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선을 베풀어 구제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지금은 대속의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마리아는 이것을 알고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가장 값진 것을 드리며,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간절히 원했다.

마리아는 무엇보다 예수님을 위하는 것을 첫째로 여기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 그 다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이런 사려 깊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평하며 원망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고,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세상에 계시지 않고, 잠시 후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이므로 예수님께 헌신하고 바칠 기회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먼저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여야 한다. 기회가 지나가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건강도 물질도 시간도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에 딱 맞추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복있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지식, 재능, 자녀, 재물, 명예, 지위, 영광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사용하도록 예비하신 것이므로, 이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깨닫고 주를 위해 기쁨으로 쓰임받는 사람이 참으로 복 있는 자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그 때에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에 나귀를 바친 사람이나, 300데나리온이나 하는 값비싼 향유를 주님을 위해 사용한 마리아나, 자기를 위한 새무덤을 주님께 드렸던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 유익보다고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을 위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마리아가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께 부어드렸으므로, 성경에 그의 이름과 그가 주님께 행한 선한 일이 영원히 남아 있게 되었다. 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마리아가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지, 무엇을 할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지에 대해 전하라 말씀하셨다.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위해 선을 행할 기회에 모든 것을 바로 쓰고 희생하는 것은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상급이 된다.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하고 좋은 것으로 먼저 주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마리아의 선한 행위를 기뻐하신 것은, 단지 향유 때문만은 아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믿는 믿음과,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자기의 가장 좋은 것으로 보답하려는 그 믿음과 정성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칭찬하신 것이다. 눅 12:48에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였다. 주님은 은혜를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고, 은사와 직분을 많이 맡긴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이나 재능이나 권세나 능력이나 힘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께 많이 돌려 드려야 한다.

 

구원 역사에 협력한 마리아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칭찬을 들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헌신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보다 귀하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지식을 가지고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 헌신해야 한다. 비록 우리에게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 옥합 같은 것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한 것, 즉 우리의 재능과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줄 아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 물질 낭비가 아니고, 우리 인생의 삶 중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는 저희가 되어야 하겠다.

 

 

二.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 (10-11)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릴 때,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나무랐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본문 4-5에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마리아를 책망하는데 동조하였다. 제자들의 신앙은 아직 마리아의 신앙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마리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분히 여겼다. 제자들이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지 않고 허비하느냐”고 불평하였다.

 

마리아가 식사하시는 예수님꼐 부어드린 향유는, 나드나무 뿌리에서 추출한 최고급 향유로 약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 비싼 것이었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이 하루 일한 품삯이므로, 300데나리온은 장정의 일년 치 품삯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가롯유다는 대표적으로 마리아를 나무란 것은, 만약 마약 마리아가 그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돈으로 주님께 바쳤다면, 거기서 얼마간의 유익을 취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 기회의 이익이 사라진 것이 너무나 아쉽고 원통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불평하는 근본 원인은, 자기중심과 자기의 유익을 위하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속셈은 숨기고, 겉으로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느냐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불평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바쳐 드리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이 더 크고 중요한 줄 알았다.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 한 분을 위해여 그 비싼 향유를 사용하는 것은 허비하는 것이고, 더 많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훨씬 유익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향유를 부어드리는 행위를 허비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여기고 분해하였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 중 열두 명의 수에 든 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있으면서 진리의 말씀들을 들었고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다. 그는 전도하기 위하여 여러 동네들로 보냄을 받았으며,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아 병자들을 고치기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주님의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자가 되었다. 유다가 스승을 배신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돈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돈을 사랑했고, 예수님이 일행의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사사로이 얼마씩을 빼내어 쓰곤 하였다. 요 12:6에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있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하였다. 유다는 평소에 돈에 대해서 양심을 쓰지 않았고, 돈에 대해 너무 집착하고 욕심이 많았다. 가룟 유다가 훔쳐 쓴 돈은 교회의 헌금과 같다. 교회의 돈이나 물건은 하나님의 것임로, 자기 개인의 것보다 더 아끼고 바로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을 쓰는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기로 결정해 놓고 죽일 방책을 찾고 있었다.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더 이상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안 유다는, 차제에 예수님을 원하는 자들에게 넘겨주고 돈을 받고자 하였다.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고 물으니, 그들이 은 삼십을 대가로 지불 하였다(마 26:14-15). 출 21:32에 의하면, 황소가 남의 노예를 죽였을 때 은 삼십 세겔을 배상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은 삼십은 당시 종 하나의 몸값에 해당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에 대해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선택되었지만(요 6:64),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유다는 예수님에게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랍비”라고 부르며 선생 이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은 때때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을 드러내는 고백을 했지만, 유다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다는 탐욕으로 인해 예수님과 동료들을 배신헸다.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로 부터 거둬지는 모금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랐다. 유다가 예수님 일행의 돈 가방을 맡고 있으면서, 거기 있는 돈을 훔쳐 간 것을 보면, 그의 관심이 돈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므로, 더이상 예수님을 통해 이익을 얻을 소망이 없는 것을 알고, 차제에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님을 팔고 은 삼십을 받았다. 배신은 불신세계에서도 지탄을 받는다.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는 자기 이익만을 챙기느라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은망덕을 일삼았다. 자신의 거듭된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불렀고 결국은 조조에게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불신 세계에서도 은혜를 기억지 않고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의 결국은 언제나 비극적이며 비참하였다.

 

유다는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메시아가 로마의 식민지배를 전복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다스릴 권력을 행사할 지위를 취할 것으로 믿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상할 예수님과의 친분을 통해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을 수도 있다. 만약에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한다면, 자신도 지배 엘리트 중 한 사람이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로마에 대한 반란을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죽을 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는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하고 배반했다. 유다는 자기 탐욕과 예수님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배반하고 말았다.

 

예수께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했다(눅 12:15). 사람이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이나 소돔 고모라의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망한 것이다. 세상 끝에도 말씀이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된다. 사람이 사는 것이 돈에 있지 않다. 돈을 사랑하면 돈이 우상이 되고 심령의 눈이 어두워지므로 미혹을 받는다. 딤전 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였다. 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돈을 사랑하면, 그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결국 자기를 찌르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마 19장의 부자청년도 자기의 재물을 주님보다 더 귀히 여기다가 영원한 흑암의 세계로 들어가고 말았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긴 유다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했다. 행 1장과 마 27장의 말씀(27:5-8)을 보면, 가룟 유다는 주 예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후회하였고, 자기가 받았던 은 30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주었으나, 받지 않자 그것을 성소에 던져 넣고 돌아가서 스스로 목을 매었고, 그는 죽을 때 고통을 견디지 못해 몸이 곤두박질해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왔다.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도로 가져온 은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를 삼고, 그 밭은 아겔다마 즉 ‘피밭’이라고 불렀다. 베드로는 이 일이 시 69:25에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 한 말씀이 응한 것이라 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구원 운동을 방해하는 자는, 저주받아 망한다는 뜻이다. 오늘날도 믿음을 저버리고 구원운동에 손해를 주면 가룟 유다처럼 그의 말로가 비참하게 된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가르켜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한 사람’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막 14:21)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제자로 택한 이유는, 교역자 중에도 불택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불택자도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이용되는 것을 알게 하고, 택자와 불택자를 추수 때까지 함께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며,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고, 범죄자의 말로가 비참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허비 즉 헛된 일에 사용하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려고 했던 가롯 유다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결론

1.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한 마리아.

2.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