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바와 룻

by shamerin posted Apr 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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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르바와 룻

본문 : 룻 1:14-18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생명이 사는 길로 갈 수도 있고 멸망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성경은 30:19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과 저주를 좋아하지 않고,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참 생명과 참 행복을 향유(享有)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많은 이들이 참 행복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생명의 길로 가지 않고,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넓은 길로, 사망의 길로 가기 때문이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의 가정은 일시적인 흉년과 생활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약속의 땅을 떠나 육신적 안정을 위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베들레헴은"떡집"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장차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예정하셨으므로 이러한 명칭이 붙여졌다. 베들레헴은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있는 땅이며, 세초부터 세말까지 하나님께서 항상 권고하시는 땅이며(신 11:11-12), 모압은 애굽처럼 세상을 의미한다. 엘리멜렉의 가정이 육신의 고난을 피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엘리멜렉이 죽고 거기서 모압 여인 오르바, 룻과 결혼했던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결과, 모압 땅에 거주한지 십년 만에 엘리멜렉의 가정은 나오미와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6절에 나오미가 베들레헴에서 흉년과 기근과 고난을 참고 살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고가 임하여,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하여 양식이 넉넉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녀는 모입을 떠나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8-13절에 두 며느리에게 자신들의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두 며느리는 각각 다른 선택을 했다.

 

一. 오르바는 육신이 잘 되는 길을 택했다.

현대인의 성경은 11-13절을 “내 딸들아, 돌아가거라. 너희가 어째서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너희 남편이 될 아들을 내가 다시 낳을 수 있겠느냐? 얘들아, 너희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나는 너무 늙어 재혼할 수도 없다. 만일 아직도 내가 희망이 있어 오늘 밤이라도 재혼하여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그들이 자랄 때까지 너희가 어떻게 기다릴 수 있겠느냐? 그들을 바라보고 너희가 어떻게 남편 없이 살 수 있겠느냐? 내 딸들아, 너희가 그럴 수는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당시 남편이 죽고 자식은 없을 때 그 미망인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남편의 대(代)를 이을 수 있는 계대 결혼이 허용되었다. 나오미는 자신의 나이를 감안 할 때 계대 결혼의 가망이나 의사가 없지만, 만일 재혼하여 남편을 둔다고 해도 늙어서 도저히 자식을 잉태할 수 없을뿐더러, 만일 아이를 낳았다 하더라도 그 아이가 결혼하려면 최소한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것이 어찌 가능한 이야기냐 하고, 며느리들에게 젊은 과부로 늙지 말고 친정에 돌아가 재혼하여 안정을 얻으라 권하였다. 10절에 두 며느리가 모두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고 대답했지만, 룻의 동서 오르바는 소리높여 울더니 나오미의 권면대로 자기 친정으로 돌아갔다.

 

오르바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남편도 없이 빈털터리가 된 홀 시어머니를 모시고 고생 고생하며 사는 것보다는, 고향에 돌아가 다른 좋은 사람 만나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그녀는 시어머니 나오미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들었지만 온전히 믿지 못했고,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같다. 오르바는 자기가 속한 백성에게 뿐 아니라, 자기 백성들이 섬기는 신(神)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아마도 생각한대로 픙족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르바는 단순히 시어머니의 품을 떠난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의 땅으로 사망의 길로 돌아간 것이다. 이는 마치 영생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과 유사하다.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께서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으나, 청년은 영생의 세계보다 자신의 많은 재물을 더 귀중히 여겨 결국 영원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고 말았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생명의 빛을 비추시고 생명 길을 밝히 가르쳐 주었으나,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여 그릇된 것을 택하고 영원한 어두움의 세계로 들어가 고통과 고민에 처하게 되었다.

 

8:5-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부패성을 좇아 사는 자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원을 가지고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마음을 두고 취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욕심(부패성)을 따라 육신 중심으로 하는 생각이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인 성경 말씀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굴복할 수도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과 전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반항을 일으키고, 말씀을 불순종하는 갈로 나아가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에 있는 자는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자로, 모든 것을 자기를 기쁘게 하는데 모든 목적을 둔다. 그러므로 자기 육신은 기쁘게 하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소흘히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신자가 육신의 생각대로 살면 즉,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면, 심령의 역사가 끊어지고 영적 흑암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는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서 마침내 사망의 골짜기에 빠지게 된다. 여호수아서 7장에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욕심으로 욕심으로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감추었다가 발각된 아간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 자녀들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들과 함께 아골골짜기에서 불살음을 당하였다. 선지자 발람도 재물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 백성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명예, 영광을 택하여 발락에게 갔다 여호수아의 칼날에 죽임을 당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인본주의를 택하여 행하다가 왕위를 빼앗기고 세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사사 삼손도 큰 능력과 사사의 직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자기 직무를 태만히 하며 육신의 일락을 택하였다가 블레셋에게 멸망 당했다. 이처럼 육신을 위한 선택은 현명한 거처럼 보여도 그 결과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예외 없이 사망의 고통이 임한다.

 

육신의 평안함을 따라 모압의 자기 신에게 돌아간 오르바는 시어머니가 제시해 준 생명이 사는 바른길을 버리고 사망의 길을 택하여 부자 청년처럼 영원한 흑암의 세계로 들어가고 말았다.

 

 

二. 룻은 생명이 사는 길을 택했다.

나오미가 남은 며느리 룻에게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였다(15절). 그러나 룻은 "어머니께서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하며 권면을 거절하고 오히려 나오미를 좇을 것이라 하였다.

 

룻이 자기를 유익하게 해주려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고 오히려 그녀를 붙좇은 이유는, 시모를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고대 세계에서는 자기 종족이 섬기는 신을 버리는 것은, 본토나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 이상으로 극히 어려운 일이다. 16절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룻이 말했다. 이 말은 진실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 라는 자기 신앙고백이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 재혼하면 남은 여생을 편안히 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9절), 부모와 친척, 그리고 자기가 섬기는 신을 떠나 아무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이방 나라로 가겠다는 룻의 결심은 단순한 효성이나 애정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섬기도 하나님이 백성이 되고자 하는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위대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룻은 17절에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룻이 사용한 '여호와'(Jehovah)라는 명칭은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사용하는 말이다. 이방인이었던 룻이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나오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신앙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그동안 섬기던 모압의 신을 버리게 되었다는 반증이며, 또한 자신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의 백성에 속해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룻은 시어머니를 통해 발견한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알았다. 그 분만이 참 신이시며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으로, 그분이야말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알았다. 룻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이전에 우상을 섬기면서는 알지 못했던 심령의 평안과 세상만사가 모두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로 되어짐을 깨달았다. 그래서 비록 남편이 없어도 주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고, 자기 백성인 모압 사람들보다 이스라엘 백성이, 육신의 어머니보다도 신앙의 어머니가 그리고 육신의 일락보다 하나님 섬기는 삶이 너무나 소중하여 시모를 좇으려 하였다. 이 영적 세계에서 계속하여 살기 위해서, 자기의 무익한 신과 고향, 부모, 백성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땅으로 시모를 따라가기로 결심하였다.

 

13:44-46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어떤 사람이 우연히 남의 밭에서 보물을 발견했다. 그는 좋은 진주를 발견하였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 왜냐하면, 그 밭에 있는 보화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기 떄문이다. 소유를 다 팔아서 산다는 것은, 보화를 얻기 위해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것이다.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처럼 세상에서 자기를 유익하게 하던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영적 변화에 이르지 못하다. 내게 유익한 세상 즐거움, 세상 자랑거리들을 주를 위해 희생할 때, 참으로 주 예수를 얻을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다. 구세주 예수를 위해 내게 있는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고 포기할 때, 희생하고 포기한 그만큼 가장 고상한 지식인 그리스도 예수를 얻을 수 있다. 신령한 것을 얻으려면, 그 대신 육신의 것을 버려야 한다.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보다 못한 것을 버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여리고 성의 천한 기생이었던 라합은 자신이 들은 소문만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이 섬겨왔던 신보다 뛰어나신 분이고, 여호와가 아니면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 줄 분이 없다는 것을 믿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잘 영접하여 보호해 주고 평안히 돌려보냈다.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녀는 하나님이 이미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인 것을 믿었고(수2:9), 하나님만이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홀로 주관하시는 대주재이심을 믿었고(수2:11), 이스라엘 백성을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고 복 주실 것을 믿었다(수2:12-13).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준 사실이 발각되면 반역자로 온 가족이 몰살당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룻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하였고,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의 구원 운동에 참여하려는 믿음을 가졌으므로,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들을 보호하였다. 그 결과, 여리고 성이 멸망하던 날에 그와 그의 온 집 식구만 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보전하고 창차 룻의 남편이 되는 보아스를 낳아 그리스도의 족보에까지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의 정신생활을 지배하고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관념을 심리학 용어로, 고정관념이라고도 한다. 발상(發想)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어떤 것을 생각해낸다'는 뜻으로, “발상의 전환”은 늘 하던 천편일률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의 생각을 시도하는 것을 말한다. 유럽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당시 사람들 모두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므로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을 믿었지만, 그는 천동설로는 행성들의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돈다는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저히 못할 일도 아니다.

 

달걀을 똑바로 세우기 위해 달걀 끝을 깨버린 콜럼버스를 보며 “그렇게 달걀을 세우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에게 콜럼버스는 이렇게 말했다. “남이 하고 난 것을 따라 하기는 쉽다. 그러나 처음 하는 것은 어렵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 날마다 매 사건마다 육신보다 영혼이 잘 되기 위한 선택을 위해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음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집에 모시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듣고 진리를 영생의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한 것과 혹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한 것으로 증명된다. 삭개오는 부자 청년과 달리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인생과 재물의 가치를 바로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발상의 대전환을 하여 그토록 아끼던 자기의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집에 모인 모든 이들 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하고 색개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공포하셨다.

 

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사모하여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아 베들레헴으로 온 룻은 후에 그 가계의 기업을 이을 가장 부유한 보아스와 결혼하였고, 또한 그를 통하여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어 입아 여인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 룻이 시모 나오미를 붙좇은 것은, 단순히 그를 따라간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신을 버리고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시모를 따라 생명의 길로 나가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도 오르바처럼 육신이 잘되는 사망의 길을 택하지 말고, 룻과 같이 발상의 전환을 하여 고난이 있어도 생명이 사는 길, 영혼이 잘 되는 길을 선택하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결론

1. 오르바는 육신이 잘 되는 길을 택했다.

2. 룻은 생명이 사는 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