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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살전 1:1-10 #254,380,455

제목 : 믿는 자의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서는 사도 바울이 제일 먼서 쓴 서신이며 신약성경 27권 중에 제일 먼저 쓰여진 성경이다. 데살로니가교회는 A.D.49-50년경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중 개척된 교회이다. 고린도가 아가야 지방의 수도라면,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지방의 수도로, 로마와 동방(東方)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이며, 마케도니아의 관문이다. 데살로니가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인에게 보내는 편지인 동시에 모든 믿는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데살로니가전서의 특징적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는 서신이다.

 

一.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란, 믿음의 구체적인 결과가 나타난 교회라는 말이다. 즉, 살아있는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교회라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예배 시간에 그냥 습관적으로 와서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깨달은 말씀으로 자기 삶의 변화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형식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말씀대로 자신을 변화시켜 가시적인 결과가 있는 믿음이란 말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도들의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다. 교인들 한명 한명이 믿음의 결과를 가지고 있는 교회였다.

 

데살로니가는 유럽에서 빌립보에 이어 두 번째로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진 지역이 되었다. 17:1-2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바울이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강론하여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루어졌다. 바울이 단지 세 안식일(3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데살로니가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았다. 이것은 그들이 진리의 말씀을 사모한 증거이다.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모하는 영혼, 진리에 말씀에 갈급한 영혼을 만족케 하여 주신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세 안식일 동안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였으므로 그들의 믿음이 자라나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소문난 교회가 되었다. 반면에 고린도교회는 바울로부터 1년 6개월이나 하나님의 말씀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와 같이 육신적인 신앙에 머물렀기 때문에 바울로부터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즉, “너희가 세상 사람과 다를게 무엇이냐”하는 책망을 받았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롬 10:17)

 

살전 2:13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받음'의 헬라어 '에덱사스데'(*)는 “주관적인 받아들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바울의 말을 스스로 지어낸 인간의 말이라 하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었으나, 데살로니가인들은 바울의 말을 인간적인 차원의 말로 듣지 않고 그 시간에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교역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그 시간에 하나님이 직접 자기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알고 성령으로 그 말씀을 받으면, 그 말씀이 자기 속에서 역사하여 생명의 양식이 된다.(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과 하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고, 생명의 양식으로 받고, 꺠달은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렸을 때 고기를 많이 잡았다(눅 5:1-11).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말씀에 의지해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갔을 때 복의 근원이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았다.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있다고 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마음으로 영접했을 때에 우리 속에서 역사가 일어난다. 생명있는 믿음은 반드시 역사가 일어나고 운동력이 일어난다. 죽은 믿음은 사람의 생각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생명의 역사가 없고 진보가 없다. 그러나 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자 하는 담대한 용기가 나오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성도가 처음 믿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하나, 연단을 받아 자라나 장성한 영혼이 되면, 알지 못하던 것을 밝히 깨닫게 되고, 어린아이의 유치한 일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처럼 말도하고 깨닫고 생각하게 되는 이것이 믿음의 역사가 있는 성도이다.

 

데살로니교회에 나타난 믿음의 역사는 1)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된 것(6), 2)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9), 3)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10).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여, 주를 본받는 자가 된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8절에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하고 데살로니가교회의 믿음을 칭찬하였다.

 

 

二.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희생과 수고가 따라야 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서 수고할 때에 단 마음으로 하는 것이며 억지로 하지 않는다. 아이를 사랑하기에 기저귀를 갈아주고, 안아주고, 젖을 먹이고, 아플 때에 간병을 하는 등 온갖 수고를 다한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이를 방치한다면,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거짓이다. 정말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수고하게 되어 있다. 만약 사랑한다하면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참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미국의 위대한 영성가 헨리 나우웬 박사는 하버드 대학과 예일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저명한 교수였다. 그가 글을 쓰면 저명한 작품이 되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었다. 그러던 그가 하루는 20년 동안 가르치던 교수직을 홀연히 사임하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데이브레이크(Daybreak)라는 장애인 보호시설의 평범한 직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가 하는 일이란 어린 장애아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을 씻겨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를 찾아가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세계적인 학자인 당신이 어쩌다가 강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쳐야 될 일을 버리고 이렇게 데이브레이크라는 장애인 수용소에 와서 똥, 오줌 받아내고 목욕시켜주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습니까?”

 

그때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동안 인기와 명성이라는 꼭대기를 바라보고 힘겹게 올라가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내 눈에는 나 자신의 성공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비로소 나는 내리막길을 쉽게 내려가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내 눈에 예수님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곳에서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말했다. “내가 이곳에서 돌보는 장애인들은 내 명성이나 내 지식이나 내 인기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훌륭한 교수고 저술가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 장애인들은 알지도 못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 아이들의 유일한 관심은 내가 그들을 사랑해주고 그들이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학식과 명성과 수많은 저술이 아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라고 하면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만 사랑하고 그의 몸이 되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한다면, 그는 교회를 위해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누가 시켜서 혹은 마지 못해서 억지로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수고할 것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나, 잠깐 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자기 사명을 감당해 나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또 우리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수고는 고역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앞으로 자기 아내가 될 라헬을 사랑했으므로,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했기 때문에 칠년이 수일처럼 지나갔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일은 힘들지도 지겹지도 않다. 바울은 1:24"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다.

 

사랑의 세계는 영적세계이며 신령한 세계이다. 중생한 영의 본질이 사랑이며 하나님의 본질도 사랑이다. 사랑의 세계에서 살 때에는 자기 전체가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사랑이 나온다. 이러한 사랑이 나올 때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즐거우며 더러운 것도 더럽다 하지 아니하고, 힘 드는 것도 힘 드는 줄 모르며 어떠한 희생이 와도 단 마음으로 하게 된다.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사랑이라는 동기 하나로 교회의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수고하는 진실한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야 한다.

 

고린도후서 8,9장을 보면 그들은 신생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환난과 극한 시련과 궁핍 중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드렸다. 그들의 연보는 기근으로 궁핍해진 성도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었다. 진정한 사랑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수고를 수고로 느끼지 않고 수고에 수고를 더한다. 우리가 물질을 희생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희생과 수고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말라기서를 보면 십일조는 신자의 당연한 의무이고, 그런 사람은 보통, 평범한 신자이다. 희생적인 삶이란 십일조를 드린 나머지를 가지고 헌신하는 삶이다. 우리의 신앙이 인색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 풍성히 드리는 신앙, 사랑의 수고로 나타나야 한다.

 

 

三.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다. 정치적으로 로마당국으로부터 황제숭배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고, 유대교인들로부터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소외를 당했고, 또 직장이나 그 밖에 여러 단체에서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고난을 잘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소망이 있으면 당장에 당한 어려움도 잘 견디어 낸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작은 어려움도 견디어 내지 못한다. 참된 소망에는 인내가 따라온다.

 

6:19에 소망은 신자에게 있어서 "영혼의 닻과 같다"고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환난이 올 때 그 환난을 소망으로 참고 이겨 나가야 한다. 이것이 배의 닻 같은 역할이다.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자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면서 말씀을 지킬 때에 영혼이 자라나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이것이 성도에게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자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격 없는 자에게는 귀중하고 존귀한 것을 주시지 않으며, 혹 준다고 해도 그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장관이나 도지사의 직분을 맡겨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환난 중에서 연단을 잘 받아 자격을 갖춘 성도에게 하나님이 일을 맡기고 존귀와 영광도 주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일을 맡기기 위하여 애굽에서 40년간, 시내광야에서 40년간 도합 80년간을 연단 시키셨다.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맡았던 여호수아도 모세 밑에서 40년간 수종자로 있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13년간 연단시킨 후에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였다. 다윗도 기름 부음을 받은 후 15년간 사울에게 고난을 당하다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그 일도 맡기고 그 영광도 준다. 우리 성도는 환난과 핍박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인 것을 알고 즐거워하면서 믿음으로 통과하여야 한다. 사람도 사랑하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부어준 자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신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농부가 농사하는 것도 인내 없이는 하지 못한다. 봄에 씨를 부리고 여름에 가꾸며 가을에 추수하기까지 수고하며 참아야 한다. 성도에게도 인내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종살이 하시고 능욕을 당하시고 심지어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참고 견디셨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억만분의 일도 안 된다.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받기 위해서도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내를 버리는 사람은 소망을 버리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이었다. 그들의 믿음에는 역사가 있었고 사랑에는 수고가 있었고 소망에는 인내가 있었으므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함으로 항상 쉬지 않고 기억하면서 기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온 인류의 소망이며, 만물의 유일한 참 소망이다(롬8:19). 우리 생전에 주님의 재림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이 오실 때에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나타날 수 있도록 준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한 뒤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선을 행하지 못한 것은 원통하게 여겨야 하지만, 선을 행하고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일은 우리가 하지만, 일의 결과는 하나님이 정하시기 때문이다. 6:9-10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전도해도 뚜렷한 열매가 없고 오히려 핍박을 받고 상황이 더 악화될 때 낙심하게 된다. 아무리 수고헤 알아주지 않을 때에 더욱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주권과 역사하심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며 선을 행하면 언젠가는 열매를 거둘 날이 분명히 도래한다.

 

옛말에 덕부고 필유인(德不孤 必有隣-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말이 있다. 37:25에는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하였다. 지금 당장 무엇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중단 없이 전진하여야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며 섬기며 자기 사명을 감당해 나가다 보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때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 소망은 인내를 이루게 한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갈 소망이 있으므로, 데살로니가가 교회처럼 이 소망을 가지고 현재에 당한 시험과 환난도 믿음으로 잘 이겨 나가는 저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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