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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약 2:1-26 

제목 : 온전한 믿음

 

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1-13)

1)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1)

초대교회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였다. 외모로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사람의 영혼이나 인격 자체보다, 재산의 많고 적음, 지위가 높고 낮음, 권세의 고저에 따라 차별 대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보통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한다. 14: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 되었던 자를 바울이 낫게 한 이적을 보고 사람들이 풍채가 좋아 보이는 바나바는 그들이 믿는 주신(主神) 쓰스라하고, 말은 잘하나 인물이 그보다 못한 바울은 말을 전하는 “신의 사자” 허메라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외모를 보시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체나 용모나 학벌이나 직분이나 인간의 지혜 등 외부적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 보다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신다. 다윗의 외모는 보잘 것이 없었으나, 그의 중심과 행위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좇고, 정직하게 행하여 하나님께 합한 자였기 때문에(왕상 14:8). 70인역에서 '외모로'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경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래 이것은 '한 사람에게 얼굴을 들다' 라는 의미로서, 한 사람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 즉 같은 상황에서 서로 차별을 두고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2) 교회에서 차별하는 자는 범죄자이다 (2-11)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기 쉽다. 속사람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외모가 잘 생기면 훌륭하게 보이고 큰일을 해 낼 수 있을 것같이 생각되나, 오히려 외모 때문에 교만하기 쉽다. 금가락지를 낀 사람은 명예와 존귀 아울러 부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대접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않으라”하는 것은 차별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판단이다. 이러한 구별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서로 분리시키며 피차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에, 악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물론 어떤 민족도 차별하시지 않으며,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신다. 예수그리스도는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가장 비천한 모양으로 오셨고, 세리와 창기,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의 벗이 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천하게 죽으셨다. 그리스도인의 부는 영적인 것이지, 육신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에 대한 환대와 가난한 자에 대한 멸시와 차별은, 야고보 당시의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의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 구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학 외모로 사람을 취하여 차별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2: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택하신 이유는, 누구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지혜 있고 통달한 자를 택하면 자기가 잘해서 구원받은 줄로 알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하고 미련한 자를 택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나가게 하셨다. 그렇게 하여야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사랑과 믿음이 없는 증거이며,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을 저버린 것으로 율법의 범죄자로 정함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과 믿음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사람의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대하는 것은 큰 죄이다.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우리는 이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며 죄인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다가 어느 것 하나만 범해도 우리는 모두 범한 자가 된다. 모든 율법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의 어느 하나를 범해도 그는 하나님의 법을 범한 죄인으로 정죄되는 것이다.

 

3)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행하라 (12-14)

우리가 자유의 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고 관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긍휼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으나(출 32:1-6), 하나님께서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광야 40년 동안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해 주시고, 약속대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 주셨다. 항상 긍휼을 베풀며, 믿음의 길을 가면 어려운 난관에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형통할 수 있고, 또 사람들이 잘못 되었을 때에 그들에게 긍휼을 계속해서 베풀면 그 사람들을 살려내고 건져낼 수 있다. 이것이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것이다.

 

 

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14-26)

1)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 (14-17)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는 말은, '만약 믿음이 있노라 하고 계속적으로 말만 한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는 가식적인 믿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자기 말로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다면 그것이 구원에 어떤 유익도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참된 믿음은 거듭난 사람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참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활과 행동에 반드시 변화가 일어난다.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것이며, 여기에 다른 어떤 외부적 요소나 어떤 다른 것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행함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서, 24절에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행함이 있어야 참으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부연하고 있다. 야고보의 이 주장은 일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구” 교리에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천주교에서는 야고보의 말처럼, 행위 구원을 강조한다. 가톨릭대사전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죄를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에 의해서 죄를 정화하는 천국과 지옥과의 사이에 있는 상태 또는 장소인 연옥에 간다고 주장한다. 대죄(大罪)를 지은 사람은 당연히 지옥으로 가지만, 소죄(小罪)를 지은 의인의 영혼은 그 죄를 정화함으로써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는 즉, ‘일시적인 정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 및 체류지로서 ‘연옥설’을 주장한다. 이 연옥의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고, 각자의 죄에 상응하며, 연옥에서 당하는 고통의 기간이나 경중은 지상에 남아있는 신자의 기도와 선업(善業) 즉 신자의 전구에 의해서 단축 또는 경감된다. 따라서 천주교에서는 신자의 선행이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지상에 있는 신자의 기도와 선행에 따라 연옥에 있는 영혼의 고통 받는 기간이 단축되거나 경감되어지므로 그들을 위해 의무적 선행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능력으로 즉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죄 사함, 영생, 구원, 부활, 천국을 기업으로 가지게 된다. 이러한 구원에 있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이외에 어떤 다른 인간의 행위나 다른 것에 전혀 의하지 않는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은 구원은 오직 택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님으로 구원 받은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에서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신자의 실천면에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주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것을 행할 의무가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일부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 얻은 것을 빌미로 주님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는다.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기 때문에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으름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참으로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고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여러 예증처럼 그 행위가 반드시 뒤따라야 하며, 그러한 행위가 수반될 때 그 믿음이 온전해진다고 하였다. 교회사를 보면,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대제는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열심에도 불구하고 337년 죽기 바로 직전까지 세례를 받아 교회에 속하는 일을 미루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잘못된 교리들 하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교리는 세상에서 욕망을 따라 살다가 자기가 편할 때 쉽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허가증이 되었다. 괜히 일찍 세례를 받아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하고, 그 뒤부터 육신이 누리는 것들에 제약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꺼번에 모든 죄를 씻고자 한 것이다.

 

2)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18-26)

행함은 신앙의 열매로 나타나는 행위를 가리키며, 인간의 도덕적 선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행함으로 구원이 온전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비근한 예로, 자기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을 때에,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을 보면서 당장 그에게 먹을 것과 몸을 가릴 것을 주지는 않으면서 다만 말로서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한다면, 그는 곤고한 형제, 자매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는 입으로만 거짓 선을 베푸는 외식가요 죽은 믿음을 가진 자이다. 믿음의 분량에 합당한 실천적 행위가 수반될 때에, 그 믿음이 온전해지고 그 믿음은 산 믿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깨달은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자를 큰 자로 인정하신다(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바리새인들처럼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자이며 외식하는 자이다. 우리는 성도는 주님처럼 진실하여야하며, 특별히 말과 행동이 일치하여야 한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며,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하신 말씀을 키기 위해 자신의 것에 인격적, 물질적인 손해가 있어도 지키려 힘쓸 것이다. 마태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생명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호흡하고 활동하는 것처럼,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순종)이 나온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속에 생명이 없는 증거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산 믿음을 가지라 명령하신다. 모태 신앙, 많은 직분, 오래 믿은 것도 중요할 수 있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믿음의 연조나 직분의 여하에 관계없이 살아 역사하는 행함을 가진 믿음이다. 신앙의 선진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이 면에서 좋은 본보기이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할 때,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꼭 실행해야 되는 말씀으로 믿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였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이삭을 죽이라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같이 많아지리라고 하신 언약의 말씀과 이삭을 변제로 바치라는 말씀을 다 같이 믿고 순종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친다 해도, 하나님이 만능으로 그를 다시 살려서 약속을 이루어 주실 줄로 믿었다(히 11:19).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은 분명히 믿었지만, 이삭을 바치지는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죽은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생명 있는 산 믿음에 대하여 받은 것이다. 그의 산 믿음은 외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증빙이 되었고, 외아들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산 믿음이 있었던 증거이며, 그러한 산 믿음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이다.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인 것을 믿었고, 하나님은 천상천하 모든 것을 홀로 주관하시는 대주재이심을 믿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이심을 믿었고 이스라엘 백성을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고 복 주실 것을 믿었다. 그 믿음으로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군들을 잘 영접하여 보호해 주고 평안히 돌려보냈다. 라합은 자기 본향이요, 본토인 여리고 성과 그의 육신의 동족과 친척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믿고,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참여하여 합력하였음으로, 하나님을 순종치 않는 자들이 멸망할 때에 구원을 받았다.

 

십일조를 드리면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말 3:10의 말씀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순종한 사람들은, 약속의 말씀대로 넘치도록 물질의 복을 받았다(록펠러, 콜게이트). 하늘에 심는 비밀을 깨달았던 록펠러는 생전에 24개 대학과 4,928개의 교회를 지어 봉헌하였다. 주일을 거룩하고 존귀한 날로 여겨 성수하면 하나님이 높여 주겠다고 하신 말씀(사 58:13-14)대로 믿고 순존한 사람들은, 그 말씀대로 하나님이 저를 지극히 높여 주셨다(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에릭 리델). 그러므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형식적이며 의식적인 믿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증거이다. 행하는 믿음, 산 믿음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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