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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5 09:41

"믿음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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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의 결과

성경 : 히 11:1-3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한 말씀은, 믿음의 정의를 말한 것이 아니고, 믿음의 결과를 말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로 인정하고 그것을 믿는 것이다. 히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였다. 하나님은 세상의 우상들과 달리 살아계셔서, 창조주와 입법자와 통치자로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에 절대적이며 직접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인간의 생사화복, 흥망성쇠, 부귀영화, 빈부귀천을 홀로 주장하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고, 공의로 판단하여 각인이 행한 대로 보응하심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요 1:1에서 그리스도를 말씀이라 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어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의 자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자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람이 믿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시고 그를 의인으로 간주(看做)하여 주셨다. 노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였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며, 공의로 심판하여 심은대로 거두게 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유익하게 될 것을 믿는 믿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히 11:38). 그러나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핍박이 온다. 육신이 제재 받는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이루어진다.

실상의 원어 υποστασιξ (휘포스타시스)는 기초, 실체, 실상의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에 소망하던 것이 실체로, 실제의 형상으로 임한다는 뜻이다. 영어성경 NASB는 1절을 ”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하였다. 현대어성경은 보다 자세하고 쉽게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초대교회 유명한 설교자이자 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믿음은 소망하는 것에 현실이나 실체를 준다."라고 말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체가 되도록 보증해 주며, 우리가 보지 못한 내세의 것들에 대하여 증거를 가지도록 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보지 못했다. 우리는 도성인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또, 우리의 본향인 천국에도 가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이 실제로 우리에게 임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떤 증거로 이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실상으로 임하게 되고, 확실한 증거를 얻게 된다. 지금까지 보고 듣고 체험하지 못한 일이라고 하여도, 말씀대로 행하여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이런 영적 체험을 통해서 성도는 믿음의 증거가 생기고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2절에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는 것은, 선진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소망하던 것의 실상과 증거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현실에서 생각해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구약 성경 말씀에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였다. 예수께서 요8:56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5에서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날것을 허락하시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그대로 믿고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 즉,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기뻐하였다. 그 약속의 말씀대로 2천년 뒤에 실제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으므로, 그들의 믿음이 실상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을 마치고 요단 강을 건널 때에,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하루 한 바퀴씩 육일 동안 돌고, 제 칠일에는 일곱 바퀴를 돌면 그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여리고성을 지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당시 여리고 성은 직접적인 군사 작전으로서는 거의 공격 불가능한 천연 요새였다. 즉 여리고성은 가파른 경사지 정상에 위치하였고, 대적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 밖으로 3-4m 높이의 석조 장애물을 설치했다. 따라서 성을 정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장기간의 포위 작전을 구사할 수 밖에 없으나, 그렇게 하면 오랜 기간이 걸려 이스라엘 백성들도 식량난에 처하게 되고, 다른 가나안 족속들이 연합하여 반격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여리고 성은 성문을 굳게 닫고 버티는 작전을 구사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이스라엘로서는 여리고성을 정복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루에 한 바퀴씩,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돌은 후 일제히 외쳤을 때, 여리고 성이 그들의 눈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순종하는 면을 보고, 하나님께서 만능으로 역사하여 그들이 소망하던 일이 셀제로 이루어졌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인 것을 믿고, 죽음을 각오하고 이스라엘 정탐군들을 보호하여 평안히 돌아가게 하였다. 라합은 자기 본향이며 본토인 여리고 성과 그의 육신의 동족과 친척보다도,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구원얻기를 소망하였다. 그러므로, 여리고 성이 멸망 당할 때에 실제로 구원함을 받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막 10:51-52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소경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 믿고 또 그리스도는 모든 병과 약한 것을 짊어져 주시고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니, 그들이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대답을 들으신 후에, 능력으로 그들이 앞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때 소경들이 그토록 소원하던 일이 실제로 그들에게 일어났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그 말씀이 실상이 된다. 장차 우리가 갈 하늘나라도 지금은 믿음으로 바라만 보지만, 천국에 들어가면 그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음으로 바라지만, 주의 재림 때에 홀연히 부활하고 변화되어 들려 올라갈 때는 그것이 실상이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二.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얻는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한 말씀을 믿는 믿음뿐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는 '나타난 것' 즉 창조 이전에 존재했었던 어떤 물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다. 모든 세계는 과학자들의 주장처럼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이는 모든 물질세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물이다. 이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창 1:1절의 말씀은 천지와 만물을 하나님께서 어떤 재료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말씀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거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믿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는 보이지 않는데서 나온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다. 실제 눈으로 보는 것도 100% 정확하지는 않다. 착시현상은 시각에 관하여 생기는 착각 즉 눈이 일으키는 착각으로 사물의 크기와 색깔,형태 등이 실제와 다르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영화도 일종의 착시현상을 이용한 것인데, 필름을 돌려서 1초에 24장의 정지영상을 계속하여 보여주면, 우리 눈은 앞 장면의 잔상을 그대로 각막에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뒷장면을 연속적으로 보게 되므로(잔상효과) 정지된 그림들이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화면에 보이는 체크무늬의 판은 가운데 부분이 곡선을 이루며 오목하게 들어가 보인다. 그러나 종이나 자를 대보면 직선인데, 검은 칸 안에 있는 작은 흰색 점들 때문에 착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은,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이지만, 이처럼 우리 눈으로 보는 것도 확신할 수 없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범위를 가청주파수라고 하는데, 대략 진동수가 16~20,000Hz의 영역이다. 2만 Hz를 넘는 초음파나, 200Hz 이하의 저주파는 사람은 들을 수 없으나, 동물들은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소리를 볼 수 없고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소리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후 4:18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하였다. 보이는 것은 현실 세계의 것이요, 육에 속한 것들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세의 것이요 신령한 것이다. 만사가 보이는 것으로 증거되고, 보이는 것으로 알 수 있다면 믿음은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저 증거하고 증명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과학으로도 증빙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확인한 것만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분이므로, 믿음의 눈으로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한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말씀의 내용을 보지 못하지만, 그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순종해 나가면 그 증거가 나타난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 11:40),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나사로가 죽어 장사 지낸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고 소망이 없다고 할지라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돌을 옮기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나사로가 죽은 지 사십일이냐 사백일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마른 뼈로 큰 군대를 만드시고, 광야 사십년 동안 그 백성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대적들을 우박으로 멸하신 하나님께 있어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일은 하찮은 일이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 수다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라곤 없다. 실제로 마르다가 돌을 옮겨놓은 후,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시니, 죽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 막 9:23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받은 자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역사는 하나님이 하셔서, 믿음의 증거를 얻게 된다.

 

날때부터 소경된 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이 떠져서 왔다. 그는 보지 못한 일의 실제 증거를 얻었다.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불러 ”예수가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고 대답하였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사실은, 창세 이후 처음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므로,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확실하다고 증거했다. 즉,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창 21:1-2에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권고하시고 말씀대로 이루어 주셨다. 아브라함이 그 말씀의 내용을 보지 못하고 순종했지만,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증거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처음에는 보지 못하고 믿지만 그 말씀대로 순종해 나가면 그 말씀의 내용이 이루어짐으로 증거가 된다. 이것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손에 대한 최초의 약속을 받았을 때에 그의 나이 75세였으며, 그의 나이 99세 사라의 나이 89세 때 다시 확실한 언약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몸은 마치 죽은 나무와 같아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아브라함은 말씀대로 될 것을 그대로 믿었다. 과연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의 믿음이 실상으로 나타났으며, 그 믿음의 증거로 아들 이삭을 얻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의 눈에는 비가 올 징조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그 말씀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믿었다. 노아가 홍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던 당시에는 물 심판은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하였고 본적도 없었다. 그러나 노아는 본 적이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줄로 믿고, 약 70년에 걸쳐 방주를 지었다. 과연 홍수로 세상이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때에, 그의 여덟 식구만 구원을 받았다. 믿음은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를 얻는다.

 

 

 

 

결론

1.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이루어진다.

2.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를 얻는다.